 <텔미썸딩> 무슨 말을 하는가? :::
정유진 | 2000년 04월 07일
조회 3776
<텔미썸딩>이 영화관을 나서는 관람자들에게 토론을 붙였으면 하는 장윤현 감독의 바램은 이루어진 거 같다. 그러나 그 토론이 너무 난삽해진 나머지 흐지부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한다. 다양한 얘깃거리를 제공하지만 한바탕 머릿속을 헝클어 놓는 영화를 어떤 식으로든지 정리하고 난 후에야 다른 영화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 같다.
창 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쌩한 표정의 중고생들이 몰려들어 공간이 북적거리기 시작할 때 도서관에서 나온 후 갈 곳이 마땅찮아 무작정 거리를 헤매다가 동인천으로 향하는 버수에 올랐다. 얼마 전 대형사고가 난 인현동으로 짧게 눈길을 건넨 후 길 건너편 극장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큰 기대를 버리고 동감하는 자세로 몰두할 것. 영화관에서 자신도 모르게 리모콘을 찾아 손을 뻗어본 적 있는지? 정확히 보고 듣지 못하고 놓쳐버린 화면에 대한 애석한 마음과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결심이 다투는 사이 영화 내내 지속되는 긴장감이 잠깐씩 숨통을 텄다.
<텔 미 섬딩>은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아 되새김질하게 되는 드문 영화이다. 두 번 째 관람할 때엔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뭐가 뭔지 계속 혼동되는 상황은 첫 번째나 다름없었다. 우선 눈에 띄는 두 가지 걸림돌을 지적하고 건너 뛴 다음 이 영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확신의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 두 가지 지적 ]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조형사(한석규)는 채수연(심은하)이 낙하하여 사망한 소년의 단추와 702호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비디오에서 본 뒤 문제의 702호로 달려가 채수연의 소년 간접 살인행위를 상상한다. 그런데 창에 매달려 자신의 행동을 훔쳐보고 있던 소년(어떻게 거기에 매달려 있었나?)을 발견한 채수연의 표정은 갑작스런 놀람을 나타내기에 불충분했다.
이른 새벽, 이어폰을 꽂은 채 속옷차림으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본 적이 있다. 한 뼘쯤 창을 열어놓은 채 이대로 동터오는 아침을 맞이해도 좋겠다 싶었는데, 빙그르르 몸을 돌린 순간 창이 열린 공간으로 스카이블루색 청바지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담을 넘어 불켜진 반 지하 방 창가에 선 그는 낮은 신음소리를 듣고 앞문을 갑작스레 닫아 잠그는 틈을 타 소리 없이 사라졌다. 702호 채수연의 표정은 언뜻 보기에도 거울에 비친 지하 방 여자의 그것에 비하면 턱없이 무덤덤한 편이다. 심은하의 반쯤 뜬 오만한 눈빛, 냉랭한 몸짓과 말투가 백미인 이 영화에서 이 장면만큼은 잠에서 덜 깬 듯한 몽롱한 표정이 사건 전개의 급박함을 상당히 절감시켰다는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심은하의 702호 표정 연기가 부족했다면, 프랑스행 비행기내에서의 연기는 필요 이상이었다. 채수연에 대한 관객의 신뢰를 완전히 뭉개버릴 이 에피소드는 이미 TV에서 각색하여 방영된 바 있는 의 결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비행기내의 채수연은 영화에서 구촉되어 온 그의 성격과는 너무나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즉 개인적 내밀한 경험을 갖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한 나머지 병적인 행위를 어쩔 수 없이 고통스레 행하고 있는 비극적 여주인공이 갑자기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로 옆 좌석의 남자를 유혹하는 얄팍하고 교활한 인물로 급강하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채수연이 앞서 살해한 네 명의 남자를 사귀었을 것 같지 않다. 차라리 그는 조형사에게 은근히 "저 내일 프랑스로 떠나요... 함께 가실래요?"라고 담백하게 물은 뒤, 거부당할 새라 조형사가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얼른 부정적인 답변을 미리 읽고 그 이유까지 덧붙여 대답해주는 여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행기내의 장면들은 채수연이라는 교언영색을 왜 필요로 했는가? 이것은 의사소통의 불가능에서 오는 고통스런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거짓말]
<텔 미 섬딩>은 동성애적 "코드"에 입각하여 읽으면 술술 잘 풀리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오승민(염정아)은 채수연의 어린 시절 경험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공감의 폭도 커서 채수연의 집 방화 사건 때 헌신적으로 행동한 나머지 다리를 불에 덴다. 수 차례 자살기도를 감행할 정도로 불행했던 채수연의 대학생시절 또한 옆에서 지켜본 당사자이기도 하다. 성격이나 옷차림, 외모가 남성에 가까웠던 오승민은 영화의 절정부분에서 그러나 자신의 변화(배신)을 알리려는 듯 치마를 '사' 입고 채수연에게 나타나 칼로 위협한다.
살인 동기나 범인이 모호한 채 끝나는 이 영화를 오승민과 채수연의 동성애를 중심으로 한 멜로 영화의 애증 공식으로 풀면 이렇다. 채수연의 경험을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그의 인생에 개입해왔던 오승민은 채수연과 공모하여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채수연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남성성을 내세워 그들을 압박해오는 네 명의 남성들을 살해한다. 잔인한 살인 방법의 원인은 채수연의 아버지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의 표울일 것이다. 그런데 전혀 낯선 사랑의 방식으로 조형사가 채수연에게 접근하고, 이심전심 채수연은 은근히 그에게 끌리는 것 같다. 이에 분노한 오승민은 채수연에게 보복하려하지만 좌절한다...
흥미롭게도 채수연의 기억 속에 어린이 오승민은 남자아이로 남아있다. 이 특이한 기억의 왜곡으로부터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불거지는 발견. 조형사에게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털어놓고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채수연과, 그에게 온전히 공감하며 보호해주려는 조형사는 이 영화 내 잔잔히 흐르는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하드고어스릴"속에 감춰져 녹아 있다. 조형사가 성실하고 순수한 이몽룡이라면 채수연은 시종일관 불성실한 거짓말로 자신을 은폐하는 춘향인 셈인데 이것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과거의 오승민을 남자아이로 둔갑시켜 조형사의 의심을 차단하는 것이다. 오승민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잔인한 살인들을 천연덕스럽게 잡아뗌으로써 채수연은 조형사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긍정적인 인간간의 만남을 얼핏 경험하지만 한편 파국으로 치닫게 될 만남을 이끌려면 (이 만남은 곧 채수연의 살고 죽음이 달린 문제이기도 한데) 끝까지 거짓말이 필수적인 것이다. 채수연은 거짓말로 가상의 의사소통을 경험한 대신 조형사는 심하게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쓰러지고 만다.
 [침울한 결말]
영화는 조형사가 끝까지 고개조차 들지 못할 심한 좌절감으로 몸부림치는 것으로 끝난다. 이미 떠난 채수연은 정신적으로 사지를 잃고 죽음을 경험하는 조형사의 곁에 없는 것으로 끝까지 꼭꼭 숨어 신비하게 조차 보이는 완전범죄인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그녀의 교활한 승리 뒤에는, 702호 카세트 속에 오형사가 감춰 둔 사진의 다섯 인물에게, 심지어 조형사에게 가한 잔인한 행위에서 오는 붉은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체의 선정성과 함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좌절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빠져들 법한 침울함이 숨어있다. 이런 우울한 무표정의 연원이 한갓 비관론자의 넋두리가 아니라 문들 느끼곤 하는 현실이라는데 소름이 끼친다. 이것이 바로 카타르시스의 강력한 유도물인 공포라는 걸 이 영화는 굽이굽이 돌아 간신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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