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사랑, 그것이 섹스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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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사랑, 그것이 섹스는 아니다 :::

윤상열 | 2000년 10월 06일
조회 907

영화 <청춘> 시사회

1986년 '겨울 나그네'로부터 시작된 곽지균 감독의 영화 이력은 충무로의 상투적인 멜로영화의 신파성을 탄탄한 원작과 감수성 짙은 지적 연출로 변화시킨 첫 작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독 자신의 작품경향을 뚜렷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1990년 '젊은날의 초상'으로 다시한번 20대의 자화상을 그리고자 했었던 감독의 의중은 그 당시 어느 정도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유명한 원작에 기대어 선 관찰일지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오늘 곽지균 감독은 자신의 원안대로 그려진 '청춘'이란 작품을 내 놓았다.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들리우는 자효와 수인의 나레이션은 나그네처럼 떠나지도 않고 우리들의 인생의 어느 한때에 영원히 머무를 이정표 같은 젊음에 대한 아련한 고백과도 같이 들려진다.

자효(김래원)의 전학과 그를 사랑하게 된 하라(윤지혜), 그리고 어릴적 상처로 인해 기면발작증을 일으키는 수인(김정현)과 그로부터 하염없는 사랑을 구애받는 정혜(진희경)까지. 청춘의 순수했던 기록은 그곳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하라와 자효의 첫 관계부터 청춘의 순수했던 기록은 깨어지고 수인의 정혜에 대한 애정은 기약없는 약속으로 매듭지어진다. 하라의 자살로 인하여 자효는 젊음의 나날을 섹스에 경도된 채 보내고, 기약없는 약속에 대한 기다림으로 수인은 섹스에 대한 결백에 가까운 반응들을 보인다. 그 후 자효는 비뇨기과 간호원 남옥(배두나)과 사귀게 되고, 수인은 장난처럼 시작된 학교선배와의 관계에 점점 더 탐닉한다. 하지만 정혜와의 금지된 관계가 하룻밤의 관계로 끝나고, 이에 실망한 수인은 자살하고 만다.

정혜와의 첫 수업시간에 배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이란 시구 중 '괜찮다'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서 굉장히 소중한 보물과도 같이 쓰인다. 그것은 아직까진 모든 것이 다 평화로울 것만 같은 젊음의 푸르름에 대한 광활한 자유의 외침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공감'이라는 자효의 무의식적 어투는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공감이 되는 지를 묻는 지루한 릴레이 같은 공허한 섹스신처럼 보여져서 관객으로 하여금 외면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준 것만 같다. 조바심 내는 젊음의 성에 대한 집착을 40대에 접어든 감독이 중년의 눈으로 그것을 조절해가며 보아도 무방했을 것을 감독은 오늘날의 20대의 문화의 코드를 성에만 집중해서 그것을 너무 먼저 개방화한 것은 아닌지 혹은 너무 앞서 간 것은 아닌지 그 이유를 영화 속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영화 속에서 수인과의 사랑 없는 관계에 매달리는 베르테르 마담으로 불리우는 학교 선배가 던지는 한 마디는 이 영화의 극 중 의미를 희석해서 듣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리에게 와 닿는다. '사람은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즐길뿐이다.' 결국 이영화는 아름다운 하동과 경주의 자연스런 풍광에도 불구하고 그 탐미적인 시선의 끝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청춘에 경도된 사랑인지 사랑에 매혹된 性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관객들은 오직 한 가지 매뉴얼에 반응하며 그것을 평가(?)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평가 자체가 섹스에 대한 강박관념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영화 '청춘'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가 아니라 거짓부렁이처럼 들리는 유혹과도 같은 느끼한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오해를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배우들의 연기라 할 수 있을 텐데 자효역의 김래원이 비슷한 경로를 통해 신인 데뷰한 이정재 - 배창호 감독 역시 자신의 컴백 작품으로 당시 신인이였던 이정재를 기용하여 '젊은 남자'를 찍었었다. 영화는 실패했고, 배우만 살아 남았었다 - 와 같이 여타 유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신인남우상을 수상할 수 있을는지 그 가능성은 약간은 희박해 보인다. 수인역의 김정현 역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뭔가에 짓눌리고 억눌린 오기의 연기는 여전했지만 큰 변화의 틀은 읽을 수 없었다.

다만 남옥역의 배두나는 기존 인지도에서 벗어난 배드신 연기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언론의 집중 조명되었는데, 그와 무관하게 일정하게 자신만의 선을 지켜서 연기한 그녀의 색깔이 영화 후반부의 상큼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그녀의 앞으로의 연기 생활에 있어 큰 자산이 되어줄 것 같다. 전체적으로 젊은 배우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대를 연기케 한다는 여유로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 표출된 때문인지 너무나 서둘러서 각자에게 몰입하고, 헤어져버렸다는 여운이 곳곳에 남는다.

영화 '청춘'은 청춘의 문 앞에 서 있는 90년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청춘예찬' 이다. 과연 감독의 이 의도대로 90년대 젊은이들 또한 이 "청춘"이란 영화를 예찬하게 될는지....,

아마도 이것은 80년대식 멜로영화의 기법에 젖어있는 곽지균 감독의 젊음이란 테제의 송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