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포레스트 검프>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 만약 당신이 전자의 사람이라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역시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여기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필자인 나는 그다지 <포레스트 검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밝고 예쁘고 춤을 잘 추는 12살쯤 된 소녀가 있다. 어느날 할머니가 있는 양로원에 들렀다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피부에 검버섯도 피어 있고 겉보기에도 딱 할아버지다. 말하는 투는 나이에 비해 어린 아이 같긴 하다. 그런데, 아무리 대화가 통한다고 해도, 그 할아버지를 밤에 몰래 불러서 침대 아래로 들어가서 같이 놀자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선 한다는 말이 "넌 좀 다른 것 같아" 이다. 도대체 누구랑 다르다는 건가? 이에 대한 벤자민의 대답은 "그래. 난 겉보기처럼 나이들지 않았어" 이다. 둘이서 앞으로 불꽃같은 사랑을 피어올릴 것을 암시하려는 시퀀스겠지만 너무 어색해서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처럼 이 영화에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어색함이 많다. 스토리상으로는 작위적으로 보이는 어색함이지만 때로는 이 어색함이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예컨대, 인물들이 운명의 순간에 시적인 대사를 하는 장면이다.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선장은 총탄을 맞고 벤자민에게 인생과 선택에 대한 싯구절을 읊조린다. 어느날 불쑥 찾아온 벤자민의 아버지도 동트기전 벤치에서 죽어가며 인생에 대한 짧은 독백을 한다. 양로원에서 피아노를 치던 할머니도 인생의 기회에 대한 이야기를 벤자민에게 해준다.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우아하게 들려주던 벤자민 엄마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벤자민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포레스트 검프의 엄마와 같다. 인생은 박스 안에 든 초콜릿과 같아서 어떤 맛이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하나를 먹을 때마다 그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벤자민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태어났지만 그에게는 다른 기회가 열려 있다. 영화가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을 너무 자주 내비쳐서 슬슬 짜증이 난다. 자유를 강조하는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가 중요한 순간마다 늘 대사로 써먹는 바로 그 '인생의 기회' 말이다.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헐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과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은 아마도 이런 대사들을 사랑할 것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하는 영화다. 벤자민에게 거꾸로 가는 시간은 아주 흥미로운 소재니까.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은 1920년대 재즈가 한창 미국을 지배하던 시대, 탐욕이 도덕을 지배하던 시대에 거꾸로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를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영화는 소설의 아이디어를 빌려와 한 남자의 사랑에 더 초점을 맞추어 그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는 지나치게 사랑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만 제외하고는 다른 로맨스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보인다. 10대에 처음 만난 사랑을 40대에 꽃피우고 늙어 죽을때까지 잊지 못하는 영화들은 많지 않은가. 이렇게 된 원인은 벤자민이 사회와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창 뱃사람이 되어 전쟁에도 나가더니 갑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뒤로는 사회에서 멀어진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니 사건이 생길 요인도 없고, 사건이 없으니 갈등이 생길 이유도 없다. 오로지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가족은 중요한 소재이다. 그걸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든다. 아이가 된 벤자민과 할머니가 된 데이지는 너무나 상징적이다. 그 장면에 늙는다는 것과 인생에 대한 많은 것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중간 과정이 너무나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 아쉽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중요한 이벤트이지만, 그 이벤트만을 가슴뭉클하게 화면에 담는 것 이상으로 벤자민 버튼의 인생 그 자체도 좀더 그렸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 빈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에 대한 철학만 늘어놓다가 끝난다는 것은 지나친 생략이다.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좋았다. 노인부터 청년까지 얼굴을 도화지처럼 사용한 브래드 피트는 선굵은 목소리와 그에 걸맞는 간결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22살에 찾아온 절망으로 병원에서 벤자민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케이트 블란쳇은 사랑을 기다리고 또 포기해야하는 심정을 표현하는 연기를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이처럼 두 연기자는 훌륭하지만 불행하게도 사실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같은 화면에 잡힐 때는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감독의 이름을 되새겨보자. 데이빗 핀처. 사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싶어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는데, 영화에 대한 기대가 결국 실망으로 바뀌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된 이름이기도 하다. 도대체 그는 왜 이처럼 비범한 소재로 겨우 이 정도의 평범한 영화를 만들었을까? 장식장에 꽂아둘 오스카 트로피가 필요했던 것일까?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국가별 검색
가격대별 검색
국가별 검색
가격대별 검색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