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모스트 페이머스> Already Famous! :::
오정호 | 2001년 08월 20일
조회 2802
1. 소리가 빛으로 바뀔 때
귀로 세상을 엿듣는 시절이 있었다. 어릴 적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형, 누나가 이야기해주던 아득한 세상 이야기, 방구석에서 잠이 들락말락 했을 때 우연히 듣게되던 어른들의 세상사.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즉 세상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였다.
영화도 그랬다. 영화음악 프로가 좋아서 마냥 라디오에 귀기울이던 시절, 음악을 들으면서 주인공들의 모습이나 영화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 이후 소리가 빛으로 바뀔 때 묘한 흥분이 들곤 했다. 마치 오래된 펜팔이라도 만나는 것 같은 그 반가움. 상상의 현시(顯示)는 늘 즐겁다.
2. "Look under your bed. It'll set you free."
1969년, 미국 샌 디에고. 사이몬 앤 가펑클의 "America"를 들으면서 집을 떠나는 누나. 그녀는 11살 동생, 윌리엄 밀러에게 말한다. "침대 밑을 봐, 너를 자유롭게 해줄거야."
침대 밑에는 누나가 엄마 몰래 듣던 LP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크림, 지미 헨드릭스, 자니 미첼, 밥 딜런의 음악들은 누나에게 있어 하나의 밀교(密敎)였던 셈이다. 촛불을 켜고 턴테이블에 LP를 조심스레 올리는 소년. 사춘기의 통과의례는 이와 같이 시작한다.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최근작 <올모스트 페이머스> (2000)는 이와 같은 멋드러진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10대 소년 시절 [롤링 스톤]지의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했던 감독 자신의 경험이 배어있는 이 작품은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수작이다.
음악평론가를 꿈꾸는 조숙한 15세 소년 윌리엄은 [롤링 스톤]지와 계약을 맺고 '스틸워터(stillwater)' 라는 밴드의 전미 순회 공연을 취재하게 된다.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이름, 올 맨 브라더스의 팀 분위기, 레드 제플린의 음악등을 혼합한 듯한 그룹 '스틸워터'. 밴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이 그러하듯, 소년 윌리엄은 무명에서 점점 스타로 올라서다가 해체되는 인생의 축소판과 만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음악으로 보는 미국의 60,70년대 풍경화이자 동시에 성장영화인 셈이다.
그에게는 두 명의 수호천사가 있다. 음악잡지 의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던 레스터 뱅스, 그는 윌리엄에게 음악평론에 대한 조언을 한다. "정직하게 , 그리고 냉철하게 (honest and .... unmerciful)" 그리고 또 한 사람, 동갑내기 소녀 페니 레인 (Penny Lane). 밴드를 쫓아다니며 마약과 섹스를 같이 하는 그루피(groupie)같은 그녀. 그녀의 이름도 비틀즈의 곡명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이렇게 곳곳에 록음악에 대한 짙은 향수와 오마쥬를 표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윌리엄은 록의 정신을 이어받은 적자는 아니다. 50년대의 비트세대, 60년대의 히피세대를 지나 록음악의 정신과 명맥이 점점 사라지고 있을 무렵에 그는 서 있다. 낭만적이면서도 체제전복적이었고 근원적이었기 때문에 급진적이기도 했던 록음악에 서서히 타협과 투항, 상업성이라는 이끼가 끼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본래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70년대의 록음악, 스틸워터라는 밴드의 미국 순회공연 뒤에는 과연 어떤 리얼리티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소년 윌리엄의 주변에는 당시를 풍미했던 베트남전이나 흑인민권운동, 히피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다만 "Don't take drug"라고 말하며 세뇌하는 엄마 (프란시스 맥도먼드)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결코 억압적이지 않다. 또한 히피 대신에 밴드를 따라 전국을 순회하는 그루피(groupie)들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 카메론 크로우는 적어도 이 영화를 우드스탁의 후예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새로운 매니저, 엄밀히 말하자면 보다 상업적인 감각을 지닌 매니저를 만나면서 버스에서 전용비행기로 옮겨타는 스틸워터, 조숙한 록 칼럼니스트의 눈을 속이려는 밴드멤버들, 섹스와 마약은 더 이상 해방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개인의 말초신경에 영합하고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런 모습은 극에 달한다. 그들이 탄 전용비행기가 이상기류에 휩쓸리게 된다. 추락 일보 직전, 밴드의 멤버들은 죽음을 예감하고 서로에게 숨기고 있었던 일 - 동료의 여자친구와 바람피운 이야기, 자신이 게이였다는 사실 -들을 폭풍처럼 퍼부어 댄다. 하지만 카메론 크로우는 역시 한 수 위에 있다. 스틸워터를 비행기 추락사고로 멤버들을 잃었던 비운의 밴드 레너드 스키너드(Lynard Skynard)로 만들지는 않는다. 폭풍우는 멈추고 비행기는 안전하게 공항에 도착한다. 이 순간, 멤버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환멸의 순간. 윌리엄은 트랩을 걷다 갑자기 구토를 해댄다.
3. "Stillwater Runs Deep"
 자신이 예감하지 못했던 세계, 다만 소리로만 듣고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던 세계가 15세 소년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던 셈이다. 공연을 따라다니느라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윌리엄이 사춘기를 마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즉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코 스틸워터 밴드가 아니라 윌리엄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시대(時代)가 아닌, 시절(時節)을 그린 영화인 셈이다. 시대의 리얼리티는 엉성하게 기워져 있지만 시절의 감정은 보편적이다.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본래 모습이자 동시에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어떤가. 아직 개봉은 하지 않았지만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결코 카메론 크로우의 낙관주의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스튜워디스가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온 누나, 페니 레인과의 사랑을 통해 훌쩍 커버린 윌리엄, 또 다시 먼 길을 떠나는 스틸워터 밴드.
우여곡절 끝에 [롤링 스톤]지의 커버를 장식하는 스틸워터. 윌리엄의 기사 제목인 "Stillwater runs deep". 이 제목은 비단 스틸워터 멤버만의 것이 아니라 소년 윌리엄의 사춘기에도 공명하는 글귀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카메론 크로우 감독이었기에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탄생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카메론 크로우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해 왔던 소리를 빛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 필자 오정호는 EBS [씨네마천국] PD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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