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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tation of Life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본 한국사회 :::


양유창 | 2001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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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년 정도 되었을거다. '엽기'라는 단어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번져가고 있었다. 특히 공포영화 마니아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고, 그럴 때마다 '엽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무언가 더 '엽기'적인 것이 그들을 일반 사람들과 구분시켜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몇 년 후 '엽기'라는 단어는 대중어가 되었다. '네이버컴'이 조사한 인터넷 인기검색어 순위에서 'MP3'나 '섹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더니 급기야 '엽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마저 등장했다. 예전에 사용하던 '엽기'라는 단어의 지독히 외곬수적인 면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인터넷의 인기검색어가 된 단어의 유행성 뿐이다.

"씀미다", "^____^' 같은 통신용 어휘와 이모티콘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PC통신 유머란의 김호식의 [엽기적인 그녀]가 급속도로 인기를 얻어가면서 급기야 책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고, 그 상업성을 간파한 '신씨네'는 작가에게 영화화를 제의, 이것이 2001년 한국 여름 극장가를 섭렵한 영화 한 편의 모태가 된 것이다.

비록 영화는 원작의 재치발랄한 연애담과 필치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런 비판을 무색케 할 정도로 관객은 <엽기적인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은 영화의 작품성을 떠나서 우리 사회에서 '엽기적인 그녀'가 갖는 의미를 되집어보게 만든다.

우선, '엽기'라는 단어의 유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점점 뭔가 튀는 것,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유교사회에서 서구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의 단계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두리뭉실한 면이 없지 않지만, 확실히 그전에는 차마 자신있게 전면에 나서지 못하던 '튀는 사람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오면서 튀지 못하는 일반 대중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심리적 욕구가 '엽기'라는 단어로 발현된 것이다.

둘째, 영화의 흥행성공은 여성의 지위향상에 대한 기대감과 또한 그것을 억제하려는 측의 안도감의 합작산물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는 많은 돌출행동을 하고 남자를 제멋대로 다룸으로써 사회적 지위상승의 기회를 바라고 있는 여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만, 영화의 종반부로 가면서 '그녀'가 점점 기존의 다른 여자들과 다르지 않은 '남자를 기다리는 순정적인 여성'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기존의 남성우월주의를 유지시키려는 사람들의 욕구까지 채워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도는 다분히 이율배반적이지만, 대중의 양면성을 정확히 읽어냈다는 점에서 제작사의 기획능력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아직 성숙하지 못한 한국 영화계의 단면을 반영한다. 이 영화는 사실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의 기초가 된 소설의 인기, 차태현전지현이라는 두 배우에 대한 호감,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마케팅과 네티즌 펀드를 통해 흥행에 성공했다. 통상 개봉 3일 전 예매량을 통해 영화의 흥행을 거의 90% 예감할 수 있는 현 한국 영화시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초반 마케팅의 잇점은 영화의 흥행을 미리 예감하게 했고 제작사는 더 자신감을 얻고 과감히 베팅할 수 있었다. 사실 곽재용 감독과 '엽기적인 그녀'의 시나리오만으로는 아무도 영화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가 완성되어서 공개되기도 전에 네티즌들은 이 영화에 열광했고,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극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근래 볼만한 연인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흥행요인이긴 했겠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의 완성도에 관계 없이 초반 마케팅과 막연한 선호도에 현혹되어 극장을 찾았다.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 등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작품성도 확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엽기적인 그녀>는 영화의 퀄리티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끌어모은 특이한 케이스이다.

단순한 기획영화가 한국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것은 한국영화계로 볼 때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영화 산업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기존에 주먹구구식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대중의 기호를 읽고 분석하여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시스템을 발전시킨다면 시장점유율을 꾸준하게 유지하기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자국영화가 시장점유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일한 국가는 인도이다. 인도에서는 화려한 노래와 춤을 담은 영화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일년에 수백편씩 제작되며 덕분에 헐리우드 영화는 인도에서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인도의 높은 자국영화 경쟁력은 일면 부러워보인다. 하지만, 잠깐 눈을 돌려 인도의 국경을 벗어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도영화는 비록 영어로 제작되는 영화라 하더라도 지역적인 특색이 너무 강해 세계시장에서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인도적인 춤과 노래를 보려하지는 않는 것처럼, <엽기적인 그녀> 역시 바다를 건너가면 전세계에서 제작되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의 한 종류 정도로밖에 취급받지 못할 것이다. 비록 한국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데에는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편성으로 승화해내지 못함으로써 단순히 지엽적인 상품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엽기'라는 단어가 본래의 '공포'스럽고, '잔인'한 것을 지칭하는 것에서 벗어나 단지 '쇼킹'한 것만을 의미하는 형용사로 의미 변환하고 있다. 과거 '엽기'라는 단어에서는 마니아들의 흥분에 찬 감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 '엽기'는 그저 물의 깊이를 측정하기 위해 남자친구를 호수에 빠뜨려보는 정도의 1회용 대담함 밖에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세상이 모두 진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엽적인 것에 열광하는 대중심리에 대한 지적 역시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엽기'에 열광하는 최근 한국사회는 부흥기에 놓인 한국영화를 담보로 상업성과 즉흥성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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