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야 아이디어가 나온다." 비단 B급 영화인들만의 슬로건은 아닐 겁니다. 몇 억을 들여서 만들어낸 화면에 필적할만한 작은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서 금전적인 가치를 지니니까요. 돈이 없기 때문에 B급영화의 생명은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있습니다. 주류영화들이 관객을 잃을까봐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전복적인 일탈을 행하는 것도 이것과 맞닿아 있지요. 하지만 아이디어의 수급에 있어서도 주류 영화들에게 밀리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재능 있는 인력들은 엄청난 연봉과 빨간색 페라리로 현혹되어 모두 메이저 영화사의 스튜디오에 모셔있는 현실이니까요. 아주 가끔씩 <메멘토>같은 아이디어만으로 똘똘 뭉친 영화들이 튀어나오긴 합니다만 그리 흔한 일은 아닙니다.
여기에 <레트로액티브>를 조심스럽게 내밀어 볼까합니다. 정말로 조심스럽게 말이죠.^^ 사실 <레트로액티브>의 영화적 만듦새는 B급영화 특유의 조악한 냄새를 그대로 풍기고 있긴 해요. 스펙터클을 대체하는 아기자기한 액션시퀸스들, 미쳐 매듭짓지 못하고 풀어져버리는 이야기 구조, 너무나 익숙해져서 슬슬 지겨워져가는 클리세들, 나무토막 같은 배우들의 굳은 연기까지. <레트로액티브>가 이런 B급 영화들의 천성들을 완전히 극복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허나 적어도 이 영화는 아이디어 하나를 포착해서 무식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우직함이 있습니다.
<레트로액티브>가 가지고있는 최고의 아이디어는 '시간을 되돌린다'는 설정이에요. 예 물론 알아요. 결코 새로운 컨셉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의 블랙홀>에서 사용되었던 그것이니까요. 아예 <레트로액티브>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 책상 옆에는 줄곧 <사랑의 블랙홀> 시나리오가 있었을 거라는 혐의를 받을만합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이 반복된다는 설정이나 (<사랑의 블랙홀>은 하루였고, <레트로액티브>는 20분이죠.) 시간을 되돌아가는 본인 외의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도 '표절'을 의심받게 합니다.
그러나 <레트로액티브>와 <사랑의 블랙홀>을 양쪽에 두고 표절운운하며 피곤하게 보지 마시길. 참 소모적인 일입니다.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같아도 로맨틱 코미디였던 <사랑의 블랙홀>과 달리 '스릴러'라는 옷을 입힌 <레트로액티브>는 다른 색깔의 영화입니다.
카렌(카일 트레비스)이라는 범죄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우연히 얻어 탄 자동차엔 사이코 기질이 다분한 남편과 그런 남자들이 꼭 한 명씩 데리고 있는 유약한 아내가 타고 있었습니다. 무난한 여행이 될 리 없겠지요. 아내의 부정사실을 알아 챈 사이코 남편은 급기야 총질을 해대기 시작하고 아내는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이제 남은 건 카렌의 생사죠. 그녀는 사이코에게서 도망치다, 우연히 타임머신을 이제 막 개발해서 시험단계에 있는 연구소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비극적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카렌은 20분전으로 되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게 됩니다.
<레트로액티브>가 무엇보다 탁월했던 건, 뒤로 갈수록 흥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탄력성입니다. 사태를 수습하려 과거로 돌아갔는데, 이건 수습은커녕 더 크게 저질러놓고, 다시 해결하려 한번 더 돌아갔는데 역시 엉망진창이 되버렸죠. '엎친 데 덮친 격'이란 속담을 흥미 있게 재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같은 장소를 여러 번 돌아간다는 아이디어 덕분에 영화는 같은 세트를 여러 번 반복해서 재 사용하는 실효성을 거듭니다. 참으로 뻔뻔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제작비를 절감합니다. 하지만 비난하지는 마시길. 아이디어가 이루어낸 성과니까요. 이야기가 충분히 흥미 있다면 같은 세트를 수십 번 사용해도 상관없는 문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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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액티브> 이것이 진정한 B급 영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