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군의 공포영화기행 <플레전트빌> 타락과 환란의 도시 'Sex Ville' 글: 원상이 2002년 01월 03일
물론, 이 비명소리들이 탁군이 저녁마다 보고 있는 호러영화속의 비명소리들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제발 좀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좀 보려므나. " 라는 형의 충고에 적잖이 충격도 받고 있던 참이라, 탁군은 그 '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라는 걸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비디오 가게에 간 탁군이 제일먼저 선택한 영화는 움베르토 렌지의 '고스트하우스.' 나 스스로도 더이상 호러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달은 탁군은 자책감에 빠져들며 말머리처럼 '일반영화'를 하나 같이 고르게 된다. 그 영화가 바로 정체불명의 성인용 코미디 '플레전트빌'이다. 사실 이 영화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보통의 호러들보다야 시각이 따뜻할 것이고 ( 적어도 TV속에 들어간 주인공들이 드라마속 주인공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 질질짜며 울음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선택된, 탁군의 최선의 초이스였다. 그러나, 바로 위에 성인용 코미디라고 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탁군은 이 영화를 약간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과거의 TV 시트콤인 '플레전트 빌' 안으로 들어간 두 남매가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을 좀 더 활기차고 생동감있는 것으로 바꿔주며 흑백이던 사람들의 인생을 '컬러'로 만들어준다는 부드럽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미 예전에 '스테이 튠'이라는 영화에서도 시도되었던 이야기이지만 그 영화가 SF 어드벤처였던 반면,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 그 차이를 둘 수있겠다. 그럼 영화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일까? 아니다. 사실 탁군은 처음 플레전트 빌로 날아간 리즈 위더스푼이 남자친구를 꼬드겨 잠자리를 하는 장면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고등학생들이 응응거리는데 살인마도 없어???? --;; ![]() 그 다음부터는 이게 대체 무슨 놈의 가족영화냐는 생각이 대가리를 강하게 후려갈기고 있다. 온동네 고딩들이 삼삼오오 호수앞에 모여 응응거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장면들은 흑백으로 상징되는 억압에서 벗어나 컬러로 상징되는 자유 ( 뭐, 이 밖에 이런 비슷한 의미는 다 포함될 것이다. ) 로의 해방을 나타내는 장면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표현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 흑백의 마을모습을 보면 정말 심심하다. 불도 없고, 싸움도 없고, 모두가 사랑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간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만약 주인공들이 그들에게 자신들이 온 세상의 즐거운 문화를 가르쳐주며 그들에게 살아가는 재미를 가르쳐 주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재미는 섹스밖에 없고, 우리를 억압하는 것도 성밖엔 없다는 표현이 조금 눈에 거슬린다. 온동네 고딩들이 응응거리며 자신들의 모습에서 컬러를 되찾고 있을 때,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사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 역시 섹스에 문제가 있어서이다. ![]() 더군다나 그 외도의 상대, 가게주인 빌 아저씨는 어떤가. 그는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외치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지만 여전히 그의 몸은 흑백이다. 그러다가 주인공 어머니와 자고 나면 어느새 그의 몸은 컬러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결국 그를 억압하고 있던 것도 성적욕망이었던 것이다. ( 게다가 그는 멀쩡히 남편까지 있는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 -의 누드를 그려 온동네 사람들이 보는 가게 창문에 붙여놓는다. 마치 어떤 여자를 따먹었다고 자랑하는 젊은이의 유치찬란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 이건 완전히 플레전트 빌이 아니라 섹스빌이다. 동네가 이렇게 망가져가는 가운데 온 동네 남자들이랑 다 응응거리고 다니던 - 실은 마치 그렇게 묘사되는 - 메리 수 ( 리즈 위더스푼 ) 는 다른 친구들을 다 섹스중독자로 만든 다음 지는 공부를 시작해서 마지막에 컬러를 되찾고 대학까지 가게 된다. ( 이런 싸가지 없는...... ) 왕따 주인공 '버드'는 어떨까. 그는 여자랑 잠자리를 하지 않지만 그가 컬러를 되찾는 요인은 '폭력'이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찝적거리던 동네 건달을 때려눕힘으로 컬러를 되찾는 것이다. ( 이 동네 건달들은 싸움을 잘 못한다. 원래 싸움이란 것이 없는 동네였으니.... ) 이제 플레전트 빌은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소돔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그런 곳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보수적인 기성세대들도 섹스와 폭력에 미쳐 있음을 밝혀내고 예정된 해피엔딩으로 이끌어간다. 어찌보면 흑백의 플레전트 빌은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는 공산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고, 컬러의 세계는 그 대칭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특히나 보수적 기성세대들이 책을 태우는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기도 한다. ) 그러나 자유주의를 대표해야할 컬러의 세계는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헐리우드 영화속의 흑인 할렘가처럼 되어버렸다. ( 그것도 상당히 이쁜 화면에서 표현되니 섬뜩하기까지 했다. ) 뭐, 사실 영화속에는 사람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어 책이 생겨난다 뭐 이런 식의 내용도 있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섹스였다는 것이 드러나니 다른 내용들은 모두 다 죽어버리고 만다. 과연 영화를 보면서 등장인물들의 섹스와 외도만 보였던 탁군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자유를 일탈과 방종으로 보는 감독이 잘못된 것인지,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