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서울 독립 영화제 단편 경쟁 1.

멀더군 영화제 가다

2002 서울 독립 영화제 단편 경쟁 1. :::

성재원 | 2002년 12월 29일
조회 7131

1. 바다를 간직하며 (원(one) 감독, 2002)

디지털 영화 [바다를 간직하며]는 솔직하고 소탈하다. 혹자는 세련되지 않고 거칠다 말할 수 있겠지만 20살 감독의 화법으로 더할 나위 없이 딱이라는 생각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천박한 상업주의와 획일적인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려하고 질서 정연한 외양의 추함과 위선을 까발리는 논리는 직접적이고 직유에 가깝다. 밤거리의 네온사인과 이른 아침 등교길의 학생들의 모습은 흔하고 흔한 풍경이지만 MC 스나이퍼식의 통렬한 나레이션으로 걸러지자 황폐한 사막처럼 일그러진다. 비판이 정당한 것은 주인공들이 이미 그런 교육을 겪어왔고 그 혜택(?)을 받아 빈곤한 삶을 살고있는 생생한 증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젊은 그들에게 대안을 고민하는 것보다는 이상에 대한 꿈을 키우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물론 성숙해지면서 이상과 대안을 통일해가겠지만 말이다. 가방끈 짧고 가진 것 없는 소녀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고작 인쇄된 바다의 이미지다.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진 바다의 영상대신 조악한 칼라화보 종이조각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젊은 영화적 감성의 승리로 본다. 이상향으로서 종이조각이 초라함은 소녀의 현실을 치열하게 반영하는 것이며 이상에 대한 강한 소망은 소녀의 행동으로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육교 위에서 도로에 떨어진 종이조각을 발견해내는 집요함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소녀의 지갑엔 화폐대신 그 동안 여기저기서 수집한 그 바다가 인쇄된 종이조각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크기별로 차곡차곡 정리하는 소녀의 정성은 치기로 보기엔 너무나 강하다.

상업주의가 판치는 영화의 시작과 획일주의적인 교육현실의 마지막을 잇는 편집전술은 공간이동이다. 거리 모퉁이에 모인 3명의 소녀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떠나는 곳은 바다가 아니다. 얼마 안되는 돈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의 폭은 돈으로 환산했을 때 수십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비슷한 도심의 공간으로의 이동이 중요한 것은 공간의 사이에 바다를 느낄 수 있는 자연 - 한강이 있기 때문이다. 한 평의 크기만한 택시는 요긴한 놀이도구이다. 준비한 카세트 테잎으로 노래를 들으며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상쾌한 한강의 바람을 즐긴다. 작열하는 태양은 없지만 한강변의 가로등과 야경은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바다가 그려진 조악한 종이조각을 한 장 한 장 모으듯 소녀들의 일상적인 유희도 현실적인 것이다.

초라하며 소박한 소녀들의 유희는 일순간 환상적인 물속의 장면으로 전환한다. 깨벗은 채로 파아란 물 속에서 헤엄치는 소녀들의 자유로움을 감독은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 스타일로 미끄러지듯이 담아내고 있다.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에의 가녀린 희망을 역동적으로 담아낸 멋진 장면이다. 물론 수영장의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미숙한 준비와 촬영의 문제가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그것을 자연스러운 자신의 한계로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소탈함이라 하겠다.

이 유쾌한 장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긴 터널 씬은 현실로의 회귀를 준비하는 장면이다. 터널 입구에서 끝까지 그대로 필름에 담아낸다. 여기서 관객이 느끼는 지루함은 주인공들이 답답한 현실에서 느끼는 지루함이며 별반 차이 없는 도심으로 밖에 갈 수 없는 한계에서 절감하는 반복의 벽일 것이다. 비판의식을 갖고 초라한 현실을 나름대로 살고 있는 소녀들의 현실은 젊다. 긴 터널을 지나듯 시간의 터널을 지나 성숙해질 때 지갑 속에 모아두었던 바다의 모습은 아마도 근사한 공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2. 연분 (이애림 감독, 2001)

총체적으로 이국적인 애니메이션이다. 인물의 외모와 의복, 집의 형태, 태양과 달의 모양, 반인반수의 존재, 각종 도형의 이미지는 원시적이면서도 중동이나 고대 서구 회화 이미지와 흡사하다. 배경 음악 역시 이국의 전통 민속 음악의 느낌이 묻어나고 있다. 어둡고 강렬한 색채와 과장된 표현의 인물 얼굴, 분절되는 인물의 동작 등.. 이런 일련의 구성물들은 신화와 전설과 같은 이야기로 구조화되고 있다. 즉 설화가 갖는 신비감과 낯선 이미지들의 묘한 매력은 관객의 시선과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언어 이전의 것으로 상상 되는 원시언어의 거친 발음은 오히려 명확한 대사가 주는 의미의 폭을 넘어서서 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인물들의 표정 역시 거의 변화가 없고 그 인물의 전체적인 특징을 강조하여 표현된다. 그러나 단순함이 상상을 자극하고 그것이 반복됨으로써 감정은 강한 자극을 받는다. 부부가 될 수 있는 인연은 결국 운명으로 요약된다. 자신의 소망과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관계의 망은 이성과 논리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연분에 대한 개념에 포함된 신비적인 의미는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영화적 표현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연분이라는 주제가 전 세계적인 설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왜 이국적인 형태를 선택하였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당연히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과 민속적 기호들보다는 이국적인 기호가 갖는 이질감이 새롭고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할 수 있겠다.

3. 이상한 나라 (한병아 감독, 2002)

‘연분’은 그 느낌이 단일한 이국적 이미지들로 구성된 반면 <이상한 나라>는 다양한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섞여있는 기호들의 전체적인 느낌은 매우 부드럽다. 이야기의 소재는 성경의 창조 신화 중에서 원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인물의 얼굴 윤곽은 부처의 형상을 닮아 눈썹은 크게 반달모양이고 눈매는 가늘고 길다. 한편 몸집은 우람하지만 상체가 크고 하체는 짧게 표현되어있다. 반면 인물들이 사는 공간은 주로 소나무와 바위가 많은 한국적인 지형이며 그들의 의복은 한복이다. 이렇게 다양한 기호들이 충돌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전체적인 조화와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수묵화의 기법으로 색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연한색과 진한색의 경계가 모호하게 이어지고 색의 농도 역시 다소 부드럽게 선택되어 충돌과 조화가 묘하게 공존하는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이런 독특한 기호의 조합은 <이상한 나라>의 큰 장점이지만 이야기에 대한 발상은 다소 진부하며 보수적이라 하겠다. 아담과 하와가 경험하는 원죄의 의미는 신본적으로 해석하면 원죄로 인해 죽음을 인간의 삶에 들어오게 되는 치명적인 것이지만 인본적으로 해석하면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갖게 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내러티브는 전형적인 기독교의 신본적 해석에 기초하고 있으며 수치심, 두려움, 억압, 인습의 원인을 모두 유혹자인 뱀과 그의 유혹에 굴복하는 인간의 무지, 죄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이 영화는 성경적 은유로 가득하다.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아이의 이미지는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재현하고 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기뻐하는 아이의 이미지는 니고데모에게 바람의 비유를 통해 성령을 증명하는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아이는 성경의 논리를 구현하는 상징이며 다양한 이미지와 기호의 조화는 결국 이 애니메이션을 가리고 있는 하나의 보기 좋은 외피였던 것이다.

부드럽고 조화로운 형식을 벗겨낼 때 드러나는 이념의 속살은 그 맛이 사뭇 두려울 수 있다.

4. My Sweet Record (박효진 감독, 2002)

매우 짧으며 다큐에 대한 일반 상식에서 한참 비껴나 있는 작품이다. 박효진 감독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성의 말을 조심스레 쓰다듬듯 촬영에 임하고 있다. 카메라는 객관적인 기계일 뿐이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감독의 애정어린 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애초 기획 의도가 감독의 주관적인 감정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이기에 다큐에 치명적인 센티멘탈리즘은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정서를 맘껏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다큐에 대한 기존의 정의와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5. 레슨 (신은영 감독, 2002)

나른하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영화이다. 한없이 느린 필름의 결에서 돌출하는 반전의 묘가 탁월하다. 150만원을 15만원으로 착각해버리는 여중생의 경험의 폭과 지혜는 일천하게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 나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시렵니까?”하며 지혜의 위선자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질문을 던져가며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게 했던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여중생의 어눌한 말과 행동에서 부활하고 있다. 부활의 원동력은 풋사랑을 향한 대담한 열정이다. 실현하기 힘든 사랑의 퍼즐을 풀어내려는 시도는 교묘한 형식의 과외를 창조해낸다. 연상인 고등학생과의 시간차, 경험의 차를 줄이기 위해 처녀성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시도까지 감행한다. 이 와중에 겪는 내적 고민과 갈등, 그리고 결단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대생에게 대화로 풀어내는 과정은 영락없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다. 정확하게는 열정의 산파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소녀의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만다. 감독이 힘겹게 현실을 현실적으로 추스렸다는 추측을 금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산파술의 원리가 타인의 무지를 깨우침에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당연한 결말이겠다. 소녀가 수행했던 대화는 여대생의 첫경험으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템포가 지극히 느린 이유는 아마도 소녀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