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동안 한국영화는 질적인 면에서 소규모의 발전을 이뤘다. 아마도 이것은 임권택 감독의 깐 영화제 본선경쟁부분 진출이라던지 신장된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신에 따른 수출가격의 급상승 같은 것과 맞물려서 쉬리의 성공 이후 계속되어진 대작 위주의 제작경향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다만 다양한 방식과 형식으로 제작되는 독립영화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에 약간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자신만의 색깔을 갖는 일정한 제작방식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요원한 메아리 정도로만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제작이라는 작업방식의 등장으로 한결 쉬어진 촬영여건은 오히려 인터넷 상영관이라는 새로운 유통경로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내용은 그 안에 가둬져 있는 느낌이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인터넷을 통한 독립영화의 시청(관람)이라는 방식은 기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단편영화계가 ifilm이나 아톰필름처럼 다양한 내용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버라이어티한 영화들을 쏟아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간은 두고 서서히 이루어지는 투자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쉬리의 흥행으로 구축된 작년 한 해의 영화계는 쉬리의 아류작들을 쏟아낼 엄청난 위험감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식적 접근을 통한 내러티브의 확장을 통해 좀 더 다른 곳으로의 사고의 변경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실험적이고 다분히 무모한 모험을 통해 작년 한 해 우리 영화계는 쉬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작의욕의 모델들을 제시했던 한 해가 아니였나 싶다. 다만 아쉬운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영화를 별점과 흥행스코어로 사고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영화적 현실이라는 점이다. 영화 속에 불량 감자를 찾아내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다분히 회의적이라는 시각은 나의 주된 영화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지역적, 개체적 특성에 따른 차이를 인정해야만 어떠한 평가도 주관적 감점의 포인트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개인적 말다툼은 잠시 접어두고 작년 한 해를 돌아보며 어릿 머릿수로 이웃한 영화들을 꼽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여기에 소개되는 영화들은 2000년에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의 또 다른 물음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회귀로서의 영화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생각되는 영화들을 적어 놓아 보았다.
* 저장되는 영화들 혹은 가장 떠오르는 기억들
기억속의 할머니들
1. 숨결 '낮은 목소리'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로 제작된 영화다. '숨결'은 지난한 7년 간의 변영주 감독의 작업을 마무리짓는 우리 다큐멘터리 영화사와 우리의 아픈 역사가 처음으로 함께 공존했던 영화였다. 1편과 2편이 감독의 물음으로 시작된 영화라면 이 마지막 연작 시리즈 '숨결'은 거꾸로 그 물음에 대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부터 되돌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역사적 아픔을 우리세대 가장 진지한 다큐멘터리 작가로부터 들어왔던 것이다. 그 마지막 임종을 맞는 할머니들의 숨결까지도 말이다.
2. 박하사탕 1979년부터 지워지기 시작하는 한 남자의 순수한 영혼의 파괴를 다뤘던 이 영화는 영호라는 한 사내의 거친 20년 간의 역정의 이야기를 아무런 꾸밈없이 우리들에게 고백해 주었던 작년 한 해 최고의 작품이였다. 결코 호감가는 시절은 아니지만 냉큼 외면하기도 힘들었던 우리의 아픔 과거와 그 속에 자신의 깨끗한 과거를 잃어버리고 돌아섰던 한 남자의 외침의 영화. 설경구라는 무명의 연기자를 일약 최고의 배우로 주목받게 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3. 춘향뎐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참 수공업적 냄새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간다는 느낌은 역시 지울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냄새나는 풍경은 젊은 관객들에게 존경의 대사를 이끌어낼지언정 사랑(?)이라는 관심을 얻어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사료로서의 춘향전의 가치와 한국영화의 역사적 사료로서의 춘향던의 가치를 동시에 인정해 주기까지는 깐느의 노고(!)가 컸다.
4. 공동경비구역 JSA 지난주로 정확히 <공동경비구역JSA>는 분단의 장벽을 정면 돌파한 것은 물론이고, '쉬리'라는 한국영화의 흥행의 보고(寶庫)가 될 뻔한 영화를 밀어내 버렸다. 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렇게 일년의 두 편의 대박이 터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였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총격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을 미스테리 구조로 담았던 이 영화는 퍼즐을 즐기듯 재배열되는 사건의 전모가 흥미에 반전을 더해 주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가 주는 성공적인 흥행사례는 계속해서 증명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계획적인 제작시스템의 중요도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 작품이기도 했던 것 같다.
5. 오! 수정 홍상수 감독이 갖는 한국영화 안에서의 위치는 언제나처럼 독특했다. 서늘한 일상의 대화는 여전했고, 그 속에 숨겨진 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의 시선도 변함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기에 잠시 떨어져 농을 건듯한 담소가 보태진 영화가 '오!수정'이였다. 감독 자신은 약간의 변화를 도모해 본 색다른 탐구였다고 했지만 기억나는 건 때깔나는 그만의 포모드 향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홍상수가 지니는 냉소주의다. 그만이 뿜어내는 독기는 일반 관객과 그가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이자 그를 바라보는 충무로의 바로미터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여전히 그에게 푹 빠져 있고 그를 흠모해 마지않는 멀대들이 있다는 사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우리들에게 발견되는 그 만의 영화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오!! 수정이구나..하는 말투 마냥...
* 삭제되는 영화들 혹은 비만아에게 드리는 쵸콜릿
1. 삼양동 정육점 초정절 치정극의 극치를 보여준 초 절약형 영화. 제작비로 4억원 정도가 소모됐다고 하지만 '노랑머리' 제작팀들은 스스로에게 무덤관을 짜 버린 셈이였다. 성애의 노예로 전략한 듯한 시나리오와 연출력의 미숙함은 어디서도 이 영화의 미덕을 찾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2. 이프(if)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소재를 채택한 탓인지 신선함보다는 어리둥절함이 앞선 영화였다. 처녀성을 간직한 채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갖는 싱글마더라는 소재는 튀어도 너무 튀었다. 시나리오 손질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다면 평작이라는 얘기는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였을 것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정말 영화제작자도 만약에 하면 혹시나 했을까 싶다.
3. 찍히면 죽는다 관객들에게는 물론 충무로에서도 제대로 찍힌 영화가 되버린 작품이였다. 극장 안에서 사람들을 가두고 놓고 살인게임을 벌이듯 치러지는 행위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너무도 전형적인 장르의 답습밖에 되질 못했던 것 같다. '데몬스'도 그렇고 '스크림'도 그 부분을 차용했다. 하여튼 작년 한 해 공포영화의 장르적 부활은 환영할 만한 일이였지만 그 의도가 다분히 상업적인 탓인지 '가위'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평균을 밑도는 아류작 수준이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던 것 같다.
4. 배니싱 트윈 도대체 뭘 얘기하려고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생각이였다. 흥행도 그렇고 평단에서의 반응도 그렇고 온통 비난 일색이였던 것이 '베니싱 트윈'의 재난을 자초하는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던 것 같다. 신중하고도 생경한 소재에 도전하는 자세는 좋지만 그것이 모두 공동경비구역처럼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결국 남는 것은 비디오가게의 먼지낀 성인물 자리만 차지한 영화로 밖에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을 말이다.
5. 종합병원: the movie 천일동안
병원을 배경으로 한 TV 멜로 드라마 <종합병원>의 스크린 버전이다.
이 영화는 종합병원이라는 공간을 빌려 등장인물의 사회적 조건을 강조하고 여성성에 대한 성찰을 해나가려고 했다지만, 우리 눈에 비춰지는 것은 사랑이 주제인 그냥 평범한 멜로 드라마일 뿐이다. 첨단시대에 죽음을 앞둔 애절한 사랑을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의 눈물을 기대했다는 것이 의문스럽다.
* 주목할 만한 새로운 시선
1.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올해 발견된 신인 감독들 중에서 상업적으로나 평단쪽에서나 가장 돋보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이다. 릴레이 무비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탄생시키면서까지 관객들에게 자신의 인지도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찬반양론의 평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아직까진 29살의 재능있는 감독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어야겠다. 그가 어떤 작업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일지는 결코 누구도 속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찌마와 Lee'로 다시한번 자신의 상업적 스코어를 확인시켜 준 그로서는 이제 정식적인 장편영화의 데뷔작만을 남겨둔 셈이다. 과연 그가 제작사와 어떻게 상호생존의 길을 모색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그의 다음 영화를 기대해 본다.
2.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박기형이라는 외형적인 스타감독을 창출했던 여고괴담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로 그 신뢰도와 작품의 질적인 면에서는 전편을 능가하는 내러티브의 모호함과 유미성을 동시에 지닌 작품이였다. 학교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시퀸스상의 답답함을 유려한 이야기와 스릴러물 특유의 어눌함으로 헤쳐나갔던 모습이 역동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였다. 유독 구분지려해서 여고괴담이라는 전작의 타이틀이 부담스럽지 않은 신선한 자신만의 영화를 구축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은 했다고 보는 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다.
3. 플란다스의 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웃음과 사회풍자가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평범한 아파트단지를 무대로 더 이상 지루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등장인물들의 하루를 마치 몰래카메라 찍듯 사실적으로 따라가며 시작한다. 기발하고 황당한 유머를 통해 이루어지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물들의 일상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현남(배두나)의 달리기 신을 비롯해 곳곳에 삽입된 만화 적인 장면,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이루어지는 인물들 사이의 재치 있는 연결, 사실적인 대사. 각각 현남과 윤주(이성재)를 상징하는 빛과 어둠의 사용은 이 영화의 농담에 힘을 실어주며 타협을 거부하지 않지만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소박한 인물들의 삶을 빛나게 한다. 봉준호 감독의 이번 데뷔작은 몇몇 기존 장르영화가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그 엉성함을 뛰어넘는 신인답지 않은 재간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4. 동감 <동감>은 잃어버린 사랑의 아련한 향기를 되돌려 주는 영화이다.한국관객이 가장 선호하는 멜로 드라마의 틀을 가지고 있으나 통속적인 멜로의 관습을 따르지는 않았다. 눈물을 쥐어짜는 식상함과 과장으로 일관하는 신파가 없으며 또한 시공을 초월하는 두 시대와 세대가 공존하고 교류하는 환타지가 있지만, 어설픈 특수효과가 범람하거나 장황하지 않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따뜻하게 공존하면서 서로 시간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전하고 있다.
5. 인터뷰 기본적으로 질문자와 응답자의 문답으로 진행되는 인터뷰과정, 그 안에서 싹트게 되는 둘 사이의 교감은 어느 순간 질문과 대답에서 대화로 발전하게 된다. 낯선 대상에서 익숙한 여인이 되기까지 서로에 대한 관찰과 견제에서 상호개입으로 발전하는 연인의 모습은 인터뷰에 임하는 둘의 모습과 흡사하다. 사랑이 진행되는 모습이 상대방에 대한 들여다보기로써 인터뷰와 닮아있는 것이다. 영화 <인터뷰>는 인터뷰를 통해 관계를 변화시키게 된 실제 인물과 일반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변화시키게 되는 한 남자를 통해 상호 개입에 이르게 되는 사랑의 진행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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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국영화계를 결산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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