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화제: IMF 이후의 백일몽

기획특집

여성영화제: IMF 이후의 백일몽 :::

여임동 | 1999년 11월 01일
조회 1501

여성영화제가 두 돌을 맞았다.
개막 즈음해서 들뜬 낯으로 기웃거리길 몇 번 하곤 아직도 두 번째 걸음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태 전의 영화제엔 부산스레 들락거렸는데 올해엔 걸음이 뜸해졌고, 눈치엔 주변도 그렇게 썩 신바람난 듯 하진 않다. 왜 그럴까. IMF란 엉뚱한 사태 - 사실 실물적인 사태라기보다는 무언가 석연찮은 이데올로기적 인과율이란 혐의가 짙지만 - 가 모든 기대 밖의 일들을 풀이하는 명쾌한 '기원' 노릇을 하였으니, 이 역시 IMF 탓일까. IMF가 일으킨 긴축과 곤핍의 바람이 여성영화제에까지 불었다면 그건 얼토당토 않을 일이다. 여성영화제는 언제나 가난했고 또 모르긴 몰라도 장차 계속 가난할 것이다. 그 가난은 차마 억울하단 말이 사치스럴 만큼 지금 여성영화인이나 여성관객이 처한 가난한 입장을 상기시켜준다. 그렇다면 지금의 여성영화제를 감싸고 있는 조금은 침울한 분위기는 무슨 탓일까.

당장 떠오르는 건 괘씸한 이데올로기적 냄새다.
요즈막 장안의 문화적 풍경은 그런 수상한 기분과 감정의 정세를 고스란히 밝혀준다. 나라가 망하고, 경제가 망하고 그러니 그 망한 책임을 죄다 혼자 "상징적으로" 져야 하는 집안의 이성애자 남성들은 여자들이 밉고 싫은 모양이다. 홈리스는 경제적 순환의 비뚤어진 결과인 실업이 낳은 경제적 참상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희한한 근대적 체험을 겪은 남한자본주의의 문화적 정체성이, 그 궂은 모습을 몰염치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화면이기도하다. 노숙자들의 모습은 더 불안하고 위험한 집안의 남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하지만 그 모습은 잘 안보인다. 직장을 잃고 집에 들어앉은 남자들, 하루 종일 사적인 관계 속에서 친밀한 감정의 긴장을 수련해야하는 남성들은 그 관계과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종주먹을 휘두른다고 한다. 직장과 작업장에서 자신의 공적인 남성적 자아정체성 만을 계발하여온 자들이 겪는 자기보복이다. 가장이라는 자신의 상징적 지위를 버팅겨주던 (가족)임금이 없어지면서 그들은 단지 실업자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상징적 지위 전체의 위기를 겪고 있고, 그를 감당하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를 처벌하려 집을 나오거나 아니면 그 위기를 부정하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물론 이는 방자하게 줄달음을 쳐 온 가부장적 남한 자본주의의 상처이다.

그런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법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차라리 가망없는 대안이라 치고 세게 말하 자면 여성들에게 남한 자본주의의 운명을 맡기는 게 어떨까냐는 생각이다. 사실 IMF 이후에 사모님 몇 분을 제외하곤 여자들은 별반 끄덕없다. 체제의 위기나 길운에 관계없이 사적인 공간에 푹 파묻혀 있던 여자들의 못난 심리적 체질이 그런 사정을 이끌었다고 해도, 말인즉슨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건 좋은 걸 나쁘게 해석 하는 못된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다. 남한자본주의를 책임질 듯이 혹은 책임지듯이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작 그런 책임을 지는 것과는 하등 무관하다. 그건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 사는 남자들의 남성적 스토리텔링의 버릇이자 수사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공적인 세계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항상 그에 근거해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릇, 술자리에서의 정치 이야기와 경제 이야기, 거기에 한술 더뜬 국가의 힘자랑으로 착각된 스포츠 이야기는 모두 그런 남성적 공민성의 표시이다.

구제금융위기는 과도하게 기형적으로 발달한 남한자본주의의 허구적인 공적 공간이 무너져 내렸을 때, 그 공간 바깥에서 외따로 존재해온 사적인 영역-가족, 부모자식 관계, 사적인 관계 따위-이 지닌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한 국면이다.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 논리는 책도 보고 음악도 보고 살자는 논리로 대체될 수 없다. 밥만 먹고 산 적도 없고 책 안보고 음악 안듣고 산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밥을 빌어 먹고 사냐는 것이고, 그 밥먹는 자리에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서로 다른 규칙과 권력에 갇힌 자기를 만들어 왔냐이다. 지금은 그 별나게 밥벌어 먹던 자리에서 탈이 난 것이다.

구제금융위기에 여자들이 끄덕없는 것은 그 위기에 무감각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 위기가 사적인 생활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뒤덮어버렸을 때 그들은 이미 그 관계의 영역에서 숙련된 달인이 되어있었다. 그 위기를 죽고살기의 위기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보냐로 묻는 것이 그들의 문제풀이 방식이다. 골치아픈 사회학적인 단어를 굳이 끌여 들이자면 그들은 남자들의 개별화된 고립적자아와 다른 상호주관적인 관계적 자아를 빚어왔던 것이다.

남자들이 IMF 이후 자신을 지탱하던 정체성의 급소인 직장을 잃고 백지장같은 낯을 하고 있을 때, 그녀들은 커다란 동요를 겪지 않아도 된다. 그녀들은 그 위기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가장 잘 알고 있고 스스로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에 여자들에 대한 묘한 미움이 생겨난 것도 같다. 위태롭고 절박한 데 여자들은 낯빛도 그대로이고 자살도 하지 않으며 집을 나가지도 않는다. 야속하고 괘씸하거나 아니면 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 니 지금의 여성영화제의 시무룩한 분위기는 그런 저간의 사정에 협조적이지 않은 여자들에 대한 문화적 반감의 영향이 없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성영화제가 기죽을 일은 없고 또 그들 스스로도 전혀 기죽지 않는 눈치이다. 아니 차라리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더 고소해하고 더 쾌재를 불러야 한다. 그리고 그냥 잘 보고 잘 떠들고 다음 해를 기약하며 분투하면 된다. 아직도 구제금융위기 이후의 진짜 위기를 제대로 해석하고 평가할 줄 모르는 남한 자본주의의 미련함을 두고 볼 때, 그녀들은 그리고 그녀들의 영화제인 여성영화제는 할 일이 많다. 나라가 부도난 처지에 여자들이 모여 극장에서 웅성거리는 못된 짓은 할수록 득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여성영화제가 기죽을 일은 하나도 없다. 하시도 배부른 적이 없었고, 또 귀염을 받으며 여성영화제가 잘 나갈 날은 과거나 미래에나 별로 없다. 그리고 그런 외로움과 가난함이 여성영화제의 매서운 힘을 더 깨닫게 한다. 그들을 짝사랑하기만 하는 역시 남자는 남자인 한 동성애자 남성의 이런 찬사가 그들에게 얼마나 보탬이 될지 모르지만 여전히 내가 그들의 일을 사랑하는 건 변함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미심쩍은 그 제3의 길 어느 것보다 좋은 구체적인 자유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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