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평론가가 되려면...


글: 라인지기
2000년 03월 05일

누구나 평론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또 아무나 평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평론가의 ‘공인 자격증’이란 것도 없고 평론가가 되기 위한 ‘특별 시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평론가라고 해서 모두 평론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1. 평론가가 되고자 했던 계기는 무엇인가?

김시무 본래 감독을 꿈꾸었다가 영화평론가가 된 까닭은 실기보다는 이론에 맞는 적성 탓이었다. 나는 영화이론과 비평이 제대로 서야 새로운 영화적 실천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김영진 평론가가 되려고 한 적은 없었다. 고교시절부터 영화를 하려고 했지만 집안의 반대 때문에 영화과에 가지 못했다. 글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일단 평론부터 하자고 계획을 정한 후 영화과 대학원에 갔다. 영화평론을 하면 하루 속히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 됐다.

박평식 연출을 지망했으나 하길종 감독의 갑작스런 타계와 조감독 시절 ‘영화회복선언’을 발표한 뒤의 좌절과 회의, 타르코프스키를 알고나서의 무력감 등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꿈을 접었다. 평론을 통해 타인들 상상력의 뿌리를 만지고 싶었다.

유지나 의도적으로 평론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문학 텍스트 자체보다 문학텍스트를 비평하는 글쓰기에서 더 큰 지적인 희열과 매력을 느끼긴 했다. 그러다가 영화를 공부하는 와중에 아르바이트 수입도 필요하고 영화공부에 도움이 되는 글쓰기여서 영화평론과 만나게 되었다. 유학시절 5년 여 동안 영화잡지 몇 개에 프랑스 통신원으로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기억을 더듬으면 1991년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돌아온 뒤부터) 내가 쓴 글 뒤에 영화평론가 호칭이 붙었다.

이용관 복학 후 지도교수의 번역일을 돕다가 영화이론과 평론의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 원래는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나중에 평론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영화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재형 평론가는 예술가와는 또 다른 창조적 작업을 하는 직업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학자’ ‘이론가’와는 다른 개념이다. 내가 평론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 창작질서의 입장 때문이다. 영화공부란 작품 만들기와 작품 해석이 분리되지 않는다. 학창시절에 나는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한편으로 영화분석에 관한 공부를 병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영화평론가가 된 것은 나의 취향과 주변의 분위기 때문이다.

조희문 영화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많았지만 너무 가볍고, 너무 쉽게 떠돈다고 생각했다.

2. 어떤 과정을 거쳐 평론가가 되었나? (등단 매체와 처음 평을 쓴 작품)

김시무 영화관련 잡지(‘비디오 무비’)에서 기자로 일하다 1994년 9월 ‘영화예술’ 지에 ‘박광수 감독론 - 분단시대의 작가의식’을 게재함으로써 정식 데뷔를 했다. 공모를 통한 등단은 아니다.

김영진 지금은 사라진 계간 ‘영화언어’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관한 40매 분량의 글을 썼다. 치졸한 글이었지만 선배들이 참고 실어줬다. 89년의 일이었다. 대학원 과정을 마칠 무렵인 92년 하반기 무렵부터 반 백수상태로 평론은 아니고, 영화에 관한 잡문을 쓰기 시작했다.

박평식 스포츠 서울 신춘문예(88년) ‘사랑, 그 인간 구원의 미학’(배창호 작품론)으로 등단했다.

유지나 1번에서 모두 얘기했다.

이용관 전양준, 이충직 등과 계간 ‘영화언어’를 만들고, 제2호에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에 대한 분석 비평을 썼다. 물론 그전에도 10년 동안 월간 ‘영화’와 부산일보 등에 글을 썼지만 나 스스로는 〈바보선언〉이 본격 비평의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정재형 나는 학창시절에 많은 글을 혼자 썼다. 당시에는 비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장에 가서 노트에 메모를 해가면서 적어도 같은 영화를 최소 5번 이상을 보았다. 하루 5회를 한 극장에 가서 내리 앉아 다 보고 나온 적도 있다. 그렇게 혼자 공부해서 쓴 글을 처음 발표한 것은 공식지면이라면 1984년 6월 당시 창간된 월간 ‘스크린’지에 한국 영화 〈동반자〉(김효천 감독)에 관한 25매 정도의 영화평이었다.

조희문 월간 ‘영화’에 〈나인 하프 위크〉 비평으로.

3. 평론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할 필수 영화 10편

김시무 〈국가의 탄생〉(근대영화의 탄생),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표현주의의 시발점), 〈전함 포템킨〉(몽타주론의 집대성), 〈노스페라투〉(호러무비의 새경지), 〈시민 케인〉(리얼리즘 미학의 정립), 〈전화의 저편〉(네오리얼리즘의 결정체), 〈네 멋대로 해라〉(뉴웨이브의 기폭제), 〈제7의 봉인〉(예술영화의 전형), 〈노스텔지아〉(반상업주의 영화의 전형), 〈스타워즈〉 시리즈(오락영화의 절정)

김영진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나는 영화 교과서를 제시할 자신이 없다. 내가 좋아했던 영화들은 누벨 바그 영화들,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70년대 영화들이었고, 한때는 샘 페킨파도 좋아했다. 참, 요즘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다시 좋아진다. 3, 40년대 이전의 할리우드 고전과 ‘새로운’이라는 명칭이 붙는 영화사조의 대표작들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박평식 〈이반의 어린 시절〉(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화니와 알렉산더〉(잉그마르 베르히만), 〈인생유전〉(마르셀 카르네), 〈나무를 심는 사람〉(프레드릭 백), 〈동경 이야기〉(오즈 야스지로), 〈시골 사제의 일기〉(클로드 샤브롤), 〈즐거운 인생〉(프랭크 카프라), 〈시티 라이트〉(찰리 채플린), 〈해피 투게더〉(왕가위)

유지나 그런 리스트는 내게 없다. 영화를 줄곧 보다보면 봐야할 영화 리스트란 늘 변하게 마련이다. 이런 리스트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볼 때마다 풍부한 의미화가 가능한 영화들을 여러 번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용관 어찌 10편뿐이겠는가. 평론가란 광각렌즈와 망원렌즈를 양손에 들고 시인의 마음과 마라토너의 정신을 지녀야 하므로 고전영화부터 현대영화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보아야 한다. 문제는 편식하지 않는 역사적 안목이다.

정재형 〈시민케인〉(오손 웰즈)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국가의 탄생〉(데이빗 그리피스) 〈동경 이야기〉(오즈 야스지로) 〈2001 우주여행〉(스탠리 큐브릭) 〈네 멋대로 해라〉(장 뤽 고다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솔라나스, 게티노) 〈저개발의 기억〉(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 〈오발탄〉(유현목)

조희문 영화 10편 보고 평론가가 될 수 있다면 누군들 평론가가 못되리. 초기 뤼미에르 영화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영화들은 최소한 한 번씩이라도 볼 것. 주요 경향, 스타일, 감독, 국가별, 시대별로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의 기본을 갖추는 데만 적어도 500편 이상은 필요하다.

4. 평론가가 되기 위해 읽어야 할 필독서 5권

김시무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시각과 언어), 루돌프 아른하임의 ‘예술로서의 영화’(홍성사), 로빈 우드의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할리우드 영화읽기’(시각과 언어), Gerald Mast의 ‘A Short History of the Movies’ (Macmillan), John Hill 편집 ‘The Oxford Guide to Film Studies’(Oxford) 김영진 개론서들. 이를테면 ‘영화의 이해’(현암사)나 ‘세계영화사’(이론과 실천) 같은 책들.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 번역본은 없지만 ‘영화와 방법론’ 등의 비평모음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비평서는, 영화책은 아니지만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미진사). 모름지기 비평적 통찰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평식 ‘영화는 지금 혁명중’(이명원 정치 & 칼럼집), ‘영화적 현실 상상적 현실’(안병섭 평론집),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창작노트’(시공사), ‘미학이론’(문학과 지성사) 유지나 필독서 리스트 역시 필수영화 리스트처럼 유동적이고 확정적이지 않다. 최근에 영화의 총체적 이해에 도움을 준 책은 더글라스 고메리와 로버트 알렌이 쓴 ‘영화의 역사 : 이론과 실제’이다. 산업, 테크놀로지, 상대적인 미학, 문화사회적 코드와 대중성 이해에 많은 연구과제와 영감을 주는 책이면서 편협한 작가주의 영화론과 걸작 위주 예술영화론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시원한 느낌을 줄 것이다.

이용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거쳐 들뢰즈의 ‘영화운동과 이미지’까지 수백 권이 될 것.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수백 권도 다섯 권도 지름길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것에 대한 인식일 듯.

정재형 ‘꿈의 해석’(열린 책들 외),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집문당), ‘일반 언어학 강의’(어문학사), ‘자본론’(비봉출판사), ‘한국사신론’(일조각)

조희문 평론가가 되는 데 아무도 자격증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운전면허 시험보듯 책 몇 권 읽어서 될 일도 아니다. 영화에 관한 기본지식은 물론 인문학적 기반을 갖추는 일을 책 몇 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말자.

5. 가장 빨리 평론가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김시무 가장 빠른 길은 공모에 당선되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옛날 영화부터 최신 영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를 감상하고 아울러 영화이론의 발달사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김영진 ‘빨리’ 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공모에 당선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박평식 공모전 응모(빠르고, 확실하고, 당당하다).

유지나 ‘가장 빨리’ 란 늘 경계해야 될 생각이다. 특히 ‘빨리’를 좋아해서 늘 훗날 큰코 다치는 한국문화의 속성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단 패거리 문화(인맥이나 학연 같은 것)를 통해 평론가가 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집단주의는 비평인식의 장애이므로.

이용관 공모에 당선되는 길, 동인지 활동 하는 길, 영화과 교수가 되는 길, 통신에 글을 올리는 길…. 그런데 문제는 영화평론가로 등단하는 길이 극히 적다는 사실. 따라서 전문영화잡지와 기성세대가 반성해야 할 것.

정재형 아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영화평을 선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공식적인 신춘문예가 많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또한 신춘문예로 데뷔해도 역시 글을 지면에 쓴다는 것은 자신이 개척해야 할 문제이다. 영화평론가란 어떻게 데뷔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글을 잘쓰며 끊임없이 글을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가장 빨리 평론가가 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조희문 요즘처럼 아무나 평론가가 되는 시절에 남이야 뭐라건 자기 이름 앞에 ‘영화평론가’라고 붙이면 그만이다. 좀더 격식을 갖춘다면 공모전에 응모하거나 공인된 매체에 평론을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

6. 평론가가 직업으로서 가능한 것인가?

김시무 우리 현실에서는 아직 전업 평론가로 먹고 살기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일단 저널리즘의 지면이 태부족이고 그나마 그것도 영화부 기자의 차지다. 어렵게 고정 지면을 확보했다 해도 주당 10매 내외의 원고 매수로는 큰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50매 이상의 긴 글을 청탁하는 잡지일 경우 원고료 회전이 원활하지 못하여 글쓰기의 욕구를 저하시키기 일쑤다.

김영진 평론가는 돈벌이로 유망한 직업이 아니다. 고료, 방송 출연료, 다 형편없는 수준이다. 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최고가 되겠다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살기 힘들어지고 정치적 수완이 필요해질 것이다.

박평식 평론이 밥을 보장해준 적은 없었고, 없을 터이다. 10년이 흘러도 오르지 않은 게 원고료다. 심지어 깎이고 떼이는 경우도 있다(화대도 해마다 오른다더라). 굶기를 밥 먹듯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생활력 있는 배필을 만나면 다행이겠지(나의 아내는 유치원 원장이다).

유지나 개인 차이지만 평론글만으로 먹고산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선 여전히 불투명하다. 방송 프로그램이든 지면이든 오랫동안 고정란을 보장하지 않는다. 편집진의 취향이나 담당 PD, 담당 기자에 따라 평론가를 새롭게 선택하는 관행은 프리랜서 평론가를 전문직으로 키워내는 데 역부족이다. 유산이 없으면서 생계를 매달 걱정해야한다면 수많은 종류의 글쓰기(평론, 책 번역, 저작 등)와 대중강연을 병행하거나 평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

이용관 불가능. 전업평론가 불가능. 그러나 어째서 평론가는 글로서만 평가를 받는가. 평론적 활동(영화제 관계자, 방송잡지 프리랜서, 리포터, 강의, 저술 등)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영화감독과 마찬가지로 영화가 예술인 한 순수 평론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들다. 물론 역사는 언제나 예외를 인정하겠지만.

정재형 직업으로서 충분히 가능하다. 요즘엔 활자매체뿐 아니라 방송매체가 활성화되어 영화평론가는 전문적으로 활동을 하여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연기 지망생들이 스타를 꿈꾸는 것처럼 그 전문평론가로서 생계를 이어가는 평론가의 수요는 바늘구멍처럼 좁을 것이다. 무한정 널려 있는 전도양양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최고의 물리학자의 수가 몇 명이냐와 같이 직업적인 영화평론가는 남에게 존경받고 생계도 이어가지만 그 수가 한정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하고 자신의 목표도 그에 따라간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조희문 꿈깨기를. 영화를 직업으로 삼는 영화인들조차 제대로 수입을 거두지 못하는 판에 평론가가 직업이 된다면 그것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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