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화선> 훌륭한 미장센, 지나친 리얼리즘 :::
양유창 | 2002년 04월 26일
조회 7943
90년대 이래 임권택 영화는 늘 비슷하다. 액자식 구성, 시대배경을 설명하는 자막, 그리고 현실에 초연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려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보다는 눈물 흘리면서 한맺힌 인물들이 스스로 노력을 정진하는 경우가 많다. 시대를 비켜 살면서 아무도 한탄하지 않으며, 결국 안으로 분을 삯이면서 최후를 맞는다. 스스로 정치와 초연한 순응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회고하는 임권택 감독에게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한국사의 굴곡을 직접 체험해온 영화계의 노장으로서 사실 그동안 그에게는 너무 많은 짐이 지워져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할 권리가 있다. <태백산맥> 같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소재보다는 이렇게 내면적인 작품이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적어도 98번째 작품을 접하는 그 장인의 경지 앞에서 '반복'은 더 세련되어진 미장센에 대한 칭찬일 뿐이다.
훌륭한 미장센, 지나친 리얼리즘
사실 오원 장승업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기에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은 허구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권택 감독 특유의 친절한 시대상황 설명은 이 영화를 마치 그럴듯한 실화처럼 인식하게 만들어준다. 단지 술과 여자를 좋아하던 '환쟁이'라는 모티프만 가지고 만든 영화가 아닌, 19세기말 개화기를 살아낸 기벽 있는 화가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게 배어 있다.
 처음 이 영화의 기획을 접했을 때, 동양화의 제작과정을 스크린에 담는 데에 있어 새로운 영상언어를 보여줄 것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말에 나는 적지 않은 기대를 했었지만, 막상 완성된 영화 속에서 그런 모험심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다. 첫 장면, 붓자국이 한지를 먹어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던 부분에서 다소 인공적인 분위기에 긴장하며 막연하게 붓과 카메라의 부조화를 기대해 보았지만, 영상언어는 그 장면으로부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게 전부였다. 아쉬운 부분이다. 아무래도 막대한 제작비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실험은 감독 자신에게도 부담이었으리라.
그 대신 익숙한 방식의 내러티브, 전통음악을 듣는 편안함이 <취화선>에 녹아 있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규모로 지어진 양수리 촬영소의 조선시대 종로거리 세트는 인물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어주고, 실제 현존하는 화백들로부터 협찬받은 문방사우와 화첩, 그리고 김선두 교수가 대필한 장승업의 모사품들은 말 그대로 당시의 호흡을 느끼게 해준다. 또, 간혹 등장하는 유머는 기존 사극에서 볼 수 없던 기층 민중의 소박한 웃음 그대로다. 비록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현대화되어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쫓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훌륭한 미장센이란 화면에 담긴 인물과 배경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이루어진다. 사극을 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는 인물을 중심에 놓고 배경을 그에 맞추어가는 것인데, 다행히도 이 영화의 훌륭한 세트는 산수화 속에 사람을 그려넣듯 인물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이 아마,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클로즈업을 다소 많이 사용하고 있고, 비교적 더 많은 컷들로 이루어져 있어도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술에 취한 환쟁이, 신선이 되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영화의 첫 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임권택은 장승업을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면모도 갖춘 인물'로 그리고 있다. 마치 종교적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으로 분한 신선'처럼 장승업은 처음부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세상에 남기고 떠나가는 것이 마치 종교적 순례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 내면적으로는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기 위해 늘 고민하고 김홍도에 대한 열등감에 빠진 인간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감투를 마다하고 속세에 살기를 원했던 장승업은 그러나 예술에 대한 질투가 심해 조선 후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오원(五園)으로 자기 호를 짓는다. 그러나, 매번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는 '신운이 생동한다'고 자부하던 그의 성품은 그대로 배어 있어 어디에서도 쉽게 융화되지 못하지만, 그만큼 거리낄 것도 없는 삶을 산다.
 동학이 발생하고 전봉준이 장승업을 살려주는 것이나 고종에게 불려간 장승업이 궁중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이를 구해준 민영환에게 그려준 그림, 그밖에 원세개로 알려져 있는 청나라 이홍장의 오른팔 위안스카이와 관련한 대사 등 영화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역사를 담으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19세기 패배의 조선 역사는 장승업의 기구한 운명과 맞닿아 갈등을 극대화한다. 이 땅에 반복된 무수한 침략과 시름의 역사가 낳은 한의 문화는 '창'으로 대표되어 사운드트랙이 되고, 고난이 절정기에 이른 19세기 말은 역사 자체에 약소 민족의 한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감독은 그 자리에 장승업을 던져 놓음으로써 그에게 기백 있는 예술가의 방랑을 점지해버린 것이다. 마치 어느날 홀연히 신선이 되어버렸다는 속세의 설이 당연하게 느껴지도록 만들려는듯 감독은 장승업의 그림세계를 영상언어로 표현하려는 몰두를 멈추고 그를 역사 속으로 던져 버린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수준을 감안할 때 특별히 언급할 만한 부분은 없다. 다만 안성기의 연기가 가장 훌륭했다. 그는 유하면서도 강한 양반 김병문 역을 적절히 소화해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자세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갑신정변으로 몰락한 이후 장승업을 만나 그림을 꺼내주는 모습은 아주 자연스럽다. 반면 최민식의 경우 애초에 화가에 맞는 마스크가 아니었는지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 때에는 화가처럼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아마도 그것이 임 감독이 이 영화 속에 더 많은 역사성을 집어넣게 한 계기였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단지 출세한 한량이 나이 들어 달관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라면 최민식은 최고다. 두 남자 배우에 비해 세 여인(유호정, 손예진, 김여진)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당시 여인네들의 삶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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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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