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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남자> 예측할 수 있다면 반전이 아니다 :::
양유창 | 2002년 01월 16일
조회 9881
<나쁜 남자> 홈페이지에 들러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글을 주욱 훑어보았다. 어느 신문지상에서는 논쟁이 분분하다고 했지만 사실 별로 논쟁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올라오는 글들 대부분이 대단히 피상적이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글들이었다. 영화를 찬성하는 쪽은 '감독지상주의'를 내세우는 열혈 신자들이고, 반대하는 쪽은 "길가는 아무 여자나 잡고 창녀로 만들어도 괜찮단 말이냐?"라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들 혹은 글깨나 쓴다는 페미니스트들이었다.
지난주 금요일에 개봉한 이 영화가 주말동안 전국 1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3주간 최소 50만명의 관객동원을 예측하고 있다고 제작사인 LJ Film이 전해왔다. 사실 요즘 50만명이라고 하면 아주 우습지만, 10년 전만 해도 연말 베스트 10에 들어갈 만한 흥행수치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하고 단지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비디오로 직행한 뒤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떠돌게 될 운명이었다면 난 이런 컬럼 따위를 쓸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김기덕(A)의 영화에 대해 심정적인 인정은 하지만,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해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중이다. 조재현이 아니었다면 이런 성공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겠지만, 어쨌든 운이 좋았던 것인지 7전 8기의 성공인지, 처음으로 김기덕 영화가 개봉 전 예매 숫자만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어쩌면 이러한 이 영화의 흥행성공 자체가 '반전'이다. 작년에 <수취인불명>을 끝내고 김기덕이 다시 조재현과 함께 <나쁜 남자>를 찍는다고 했을 때 난 속으로 '저거 또 장선우처럼 <나쁜 영화> 식으로 이슈 만들려는 것 아냐?'라고 비아냥거렸었는데 결과는 그런 센세이션이 아니라 단지 '조재현'이었다. 김기덕 감독과 매번 영화를 같이 했지만, '출신성분'이 다른 배우 조재현이 그 다른 출신성분을 십분 활용하여 순식간에 국민배우가 되고 그 덕분으로 <나쁜 남자>까지 흥행세를 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난 걱정이 된다. 이 영화가 흥행성공한 것이 그다지 기분 좋지 않다. 차라리 이 영화가 <나쁜 영화>나 <거짓말>처럼 내용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켜 흥행에 성공했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영상 멋지고.. 음악도 죽이네!' 하고 극장을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시청률조사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피아노]의 주시청자층은 10대와 20대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좀더 나이 든 사람들은 같은 시간대에 방영한 사극들에 채널을 고정하였다. 평균 31%의 시청률을 보인 [피아노]의 마지막회에서 조재현이 한없는 부성애를 보여주며 눈물샘을 자극한 이후 조재현에 대한 인기는 더욱 높아만 갔다. 그리고 그 인기 여세를 몰아 조재현의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10대와 20대들이 <나쁜 남자>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 더러는 단체관람을 왔을 것이고, 아마 대부분은 여성들일 것이다. 나같으면 여자친구랑 절대 이 영화 같이 안보겠지만, 어떤 연인들은 주말에 이 영화를 데이트 코스로 잡았을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조재현 때문에 영화를 본다.
 조재현을 TV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은 이전까지 그의 주로 익살스럽고 어설픈 코믹연기와 [피아노]의 진득한 애정연기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재현과 김기덕의 합작품을 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전에 조재현이 이렇게 과묵하고 제멋대로인 남자를 연기한 적이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김기덕 감독과 조재현의 작년 영화인 <수취인불명>의 흥행스코어는 총 6천명으로 집계되었다. 따라서 지난 주말에 <나쁜 남자> 스크린 앞에 앉은 사람들 중 김기덕 팬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13만명 중 6천명이라면 5%도 안된다.
즉, 나머지 약 12만명의 관객들은 주말 2시간 동안 '반전'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다. 조재현이 한 마디 말도 없이 괜히 기분 나쁜 남자로 등장한 것이 첫번째 반전이었을 것이고, 돈 2천만원 못갚았다고 부모에게 연락 한 번 못해보고 혼자서 몸팔아 돈 갚겠다고 신체포기각서를 쓴다는 설정에 당황한 것이 두번째 반전이었을 것이며, 둘이 사랑을 확인하는 것 같더니 어느 바닷가에서 다시 선화가 몸팔며 유랑극단처럼 살아간다는 설정에 세번째 반전을 느꼈을 것이다. 이 세번째 반전은 아마도 12만 4천명 뿐만 아니라 나머지 6천명까지 모두 느꼈을 반전이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전혀 짐작도 못했다.
이 세 가지 충격파를 2시간 동안 고스란히 몸에 담은 10대와 20대들은 과연 기분이 어땠을까? "조재현이 왜 이딴 영화 찍었대?", "그래도 이게 무슨 국제영화제 진출한 거래잖아."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되게 기분 나쁘네." "그래도 조재현은 연기 잘했지?" 여기까지 나오면 그래도 성공이다. 아마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감정은 '우울하다'였을 것이다.
늘 불균질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위 '작가'라고 불리는 한 영화감독의 영화와 이제 막 우리의 아버지로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한 배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스크린 앞에 앉아 (비록 매체의 정보를 통해 어느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당한 세 번의 충격적인 테러가 만났을 때, 그 기분은 아주 우울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아주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지만, 은근히 기분이 나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예술가와 예술가의 작품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예술'이라는 말은 한 창작자의 작품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즉, 김기덕이 자신의 사유물처럼 찍는 영화가 아주 개인적인 생각들을 담고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감독의 생각을 유추해본 뒤 결국은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수용하게 된다. 어떤 모순된 생각에 직면할 때 인간은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태도를 바꾸거나 혹은 대상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이 말을 다시 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을 때 관객은 이해하기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한다. 지금까지의 13만명, 그리고 앞으로 50만명은 모두 이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김기덕은 세 번의 반전을 주면서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작가'이고, '예술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개인의 생각 모두가 중요할진데 영화감독이나 좀더 고상한 척하는 미술이나 음악만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데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고 실천해가는 사람을 모두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나는 김기덕이 비록 이런 범주에 드는 사람이긴 하지만, 아마도 이것이 그가 원하는 방향의 성공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일기장의 독자를 50만명으로 넓혔다. 일기장의 독자가 적었을 때는 몇 명이 키득거리거나 동감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단지 일기장 표지에 그려 있는 연예인 사진 하나보고 일기장을 펼쳐본 독자들은 일기에 적혀 있는 내용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 충격은 예상 외로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일기장을 대중에게 빼앗겨버린 김기덕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다. 이 영화의 흥행성공으로 이 영화에 대한 찬반론이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뜨겁게 이루어질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래 남의 일기 훔쳐보는 사람들은 뒤에서 키득거리기는 해도 관심거리는 일기장이 아니라 일기장에 붙어 있는 연예인 사진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세 번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대해 굳이 언급하려하거나 생각을 정리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존의 마니아들과 일부 식자층이 왈가왈부하는 정도일 것이다. 흥행성공이 영화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래서 할 말이 없어진 김기덕은 다시 새로운 영화에 착수하겠지만, 이미 일기장을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들켜버린 그가 구상할 수 있는 다음 영화는 아마 극단으로 치닫을 것이다. 대중적이든지 더 철저히 고립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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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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