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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tation of Life


<행복한 사전> 살아있는 단어로 거대한 배를 엮다 :::


양유창 | 2014년 04월 19일
조회 2713


잔잔한 줄 알았더니 마음 속에 파도가 치는 영화.
세상에 이렇게 지루한 작업이 없을 것 같고 또 그 지루함을 담은 영화의 고루함을 비웃으며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코웃음은 존경심으로 변해간다. 무언가에 자신의 일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고, 그 일을 뚝심있게 해낼 용기를 가진 것만큼 보람된 인생이 또 있을까.



1995년 사전을 펴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시작해 훌쩍 지나버린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고, 마지메도 성장했다. 이 영화는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 가득한 찬가이자 인간의 '소통'을 이루어내기 위한 진심이 담긴 미담이다.

총감독 무라코시 국장(츠루미 신고), 마지메를 추천한 뒤 은퇴하는 아라키(코바야시 카오루), 마지메와 어색한 우정을 나누는 니시오카(오다기리 조), 성실하고 사람 마음을 잘 읽는 계약직 사원 사사키(이사야마 히로코), 패션 매거진에서 옮겨온 뒤 의외로 잘 적응하는 키시베(쿠로키 하루), 그리고 사회부적응자에서 어느새 사전 편찬의 중심이 된 주인공 마지메(마츠다 류헤이)까지. 이들 여섯 명이 만들어낸 '대도해' 사전에 수록된 3천만 개의 단어는 좁고 작은 사무실에서 15년에 걸쳐 수집하고 구상하고 다섯 번의 교정을 거친 장인정신의 합작품이다. 사회와 격리된 것 같지만 이들에게 3천만 개의 단어는 3천만 번의 소통의 노력이며, 이를 통해 세상을 보게될 독자들에게는 3천만 개의 플랫폼이다.

의사소통에 문제를 겪던 마지메가 처음으로 다가가는 인물은 니시오카다. 그는 니시오카의 소통 능력을 장점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그 능력을 배우려고 한다. 그는 연애편지를 니시오카에게 먼저 보여주고 조언을 구한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흡수하려는 자세는 마지메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 마틴 올슨 래니의 책 [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다]가 제시하는 성공요건 중 하나인 "외향적인 사람의 장점을 본받아라"를 착실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어느날 마지메에게 짝사랑하는 여자가 생긴다. 하숙집 주인의 손녀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다. 마지메는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러브레터로 사랑을 고백하기로 한다. 그가 쓴 편지는 마치 사무라이가 붓으로 쓴 것 같아서 현대인들은 알아보기 힘든 것이지만 니시오카는 마지메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그녀가 널 좋아한다면 어떻게든 그 편지를 읽으려고 할 거야." 이 영화가 관객을 대하는 방식과 대도해가 15년 동안 독자를 기다리는 방식도 바로 이 대사 속에 담겨 있다. 좋은 영화는 관객이 먼저 찾아보려 할 것이며, 좋은 사전은 전자사전이 시장을 접수한 현대에도 빛을 발할 것이다.



영화는 마지메가 일상에서 단어를 채집하고 뜻풀이를 작성하고 용례를 완성한 뒤 교정을 거치는 과정을 고집스럽게 보여준다. 마지메를 비롯해 모든 인물들은 막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불미스런 사건 전혀 없이 사전 편찬에만 최선을 다한다. 회사에서도 독립된 공간에서 근무하는 그들은 술집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조차도 사회라는 바다에 떠 있는 고립된 섬 같다.

영화 속에서 마지메의 러브레터 전략은 성공했을까? 다행히도 그녀가 실연의 아픔을 견디던 순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던 순간에 마지메가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첫 등장부터 사연이 많아 보였던 카구야라는 캐릭터에 대해 영화는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 대신 그녀가 일식 셰프로서 실력을 연마해가는 과정을 살짝살짝 보여주면서 그녀 역시 마지메 못지 않게 성장해왔다고 관객을 향해 설득한다.

그러나 마지메와 카구야의 관계가 함께 있을 때에도 무척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의 종반에 이르러서 카구야가 음식을 들고 문 앞에 서는 장면이 있다. 마지메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카구야는 가만히 서 있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 조용히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이 영화가 마지메를 대하는 태도이자 관객에게 최면을 거는 방식이기도 하다. 고립된 섬은 억지로 연결하려 하지 말고 고립된 대로 놓아두자.

3천만 개의 단어를 처음 떠올릴 때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것 같겠지만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일을 해내고 나면 마치 거대한 배를 엮어낸 듯한 성취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장인정신을 숭배하는 일본인이기에 구상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스토리. 한국에서도 이런 일상 소재의 잔잔한 감동을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희망해본다.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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