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씨네라인을 읽습니다

Imitation of Life

나는 씨네라인을 읽습니다 :::

양유창 | 2000년 12월 31일
조회 9613

마왕이 나타나 "네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마"라고 말한다면?
파우스트가 된 나의 소원은 별들 사이를 나는 것이다.

그저.. 20세기 마지막 날에 글을 하나 남기고 싶었다.

나는 씨네라인에 글을 쓴다.

내가 씨네라인에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다. 운영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 나는 '씨네라인'이라는 이름이 별로 마음에 안든다. 너무 평범하다. 그래서 '리버스'라는 것도 만들어봤지만 너무 영화와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 버려서 다시 씨네라인으로 돌아왔다. 굳이 '씨네라인'이라는 이름을 지켜가는 이유는 뭘까?

다른 영화사이트에 비해 접속자가 많지도 않고 크게 튀는 것도 아니고 정보량이 엄청난 것도 아니다. 사실 나도 안다. 최신 영화뉴스 보고 싶으면 Film2.0 가고, 영화자료 찾고 싶으면 엔키노나 무비스트 가고, 개봉영화정보를 보고 싶으면 씨네서울 가면 된다. 또 인터넷 영화나 동영상은 전문 사이트가 따로 있다. 그런데도 굳이 씨네라인을 유지해가는 이유는 뭘까...

나도 잘 모르겠다. 뭔가를 쌓아간다는.. 그런 즐거움이겠지.

올해는 씨네라인과 함께 우여곡절을 겪은 한 해였다. 한참 벤처기업이나 인터넷 사이트가 붐을 이룰때, 얼떨결에 벤처사업가가 되어 테헤란밸리로 찾아가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투자유치도 받아냈다. 영화계 사람들과 영화계에 뛰어들려는 사람들을 찾아갔고, 잘나가는 한국영화계 뒷모습 혹은 앞모습을 쳐다보기도 했다.

너도나도 영화와 인터넷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들러리가 되어버린 나는 그저 주변에서 서성거렸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천문학적 액수에 더이상 놀라움도 없었다. 나는 너무 신중한 나머지 모든 계산에서 적극적이지 못했다. '대표이사', '전략기획실장', '상무' 이런 직함들 앞에서 주눅들었으며, 그들이 노는 문화에 사실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아마 마음만 먹었으면 그때 이미 씨네라인은 없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돈방석에 앉아 있거나 혹은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내 문제가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난 뭘 하고 싶은걸까? 영화? 인터넷?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

예전에는, 그러니까 10대에서 스무살을 갓넘기던 시기에는, 영화가 전부였다. 누가 나한테 지원만 해주면 <시민 케인> 같은 거 만들기는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괜히 어려운 영화 보고 어려운 책 읽고 티내기나 영화의 역사, 강의, 필름 워크샵 뭐 그런 따위 쫓아다니고 영화제 자원봉사니 뭐니.. 바쁘게 움직였다. 하루에 영화를 7편씩 보던 시절, 감상문을 적은 노트만 5-6권 된다. 학교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우습게 보이겠지만 학교 아이들은 수준이 안맞아 못놀겠다고.. 생각했었다.

레포트를 써서 내도 영화와 관련된 주제로 썼으며, 전공관련 수업이나 토론이나 발표에서도.. 영화와 미디어, 애니메이션과 영화, 영화산업의 현재와 미래, <초록 물고기> 마케팅 사례 연구, 영화기호학, 드라마틱한 TV영화, 인터넷 방송과 영화.. 1930년대 프랑스영화와 현대사회학, 70년대 미국영화에 나타난 경제공황 등등.. 지금도 기억난다. 그렇다고 내가 전공에 불만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원해서 지금의 전공을 택했고, 그래서 내 전공을 좋아한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아마 내 전공이 영화였다면 난 지금보다 훨씬 편협한 시각을 가졌을 것이다.

언젠가, 솔직히 말해,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 때가 있었다. 그건 어떤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초라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영화 때문에 질 들뢰즈를 읽고 로만 야콥슨이나 마그리뜨 뒤라스를 읽었지만, 그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나를 아주 볼품없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라는 충격. 알고 있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런 초라함.

물론 그것이 모든 이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난 스무살 이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물 한 살의 나와도 다르다. 그동안 아무것도 안한 것 같지만, 사실 매년 무언가를 벌이고 만들어왔다. 모든 다양성을 포용할 만한 어떤 겸손함 같은 것을 배웠고, 말하기 전에 들으라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 방법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으로 흘러가는 것, 똑같이 늙어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차하는 것은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는 같이 살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포용력이다. 내가 그동안 너무나 갖지 못했던 포용력.

내가 아는 문구 중에 이런 게 있다.
"당신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은 그것이 바로 최선이었기 때문에 그리된 것입니다."

또, 프리츠 랑 영화 중에 "You Only Live Once"라는 작품이 있다. <한 번 뿐인 인생>. 후회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사실 나는 쓰는 것에 비해 읽는 것을 무척 싫어한 사람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학교를 위한 것이 아니면 별로 읽어본 책이 없다. 오히려 그때문에 영상에 더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읽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그런 희망. 읽지는 않지만, 글은 잘 쓸 수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

일반적으로 여유롭게 즐기는 사람이 누리는 취미생활은 별로 발전하기 어려운 반면, 그 취미생활을 옆에서 부럽게 지켜보던 사람이 그 취미에 빠져들면 겉잡을 수없이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그 경우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어쨌든 난 덕분에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중심에 영화가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갈 수 있었다. 미술, 음악, 문학, 사진 등등에서 갑작스레 취미를 얻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하지만, 난 너무 빨리 빠져들었고 무언가 그럴듯하고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게 좋았다. 그래서 이제는 다양성들 속에서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고 또 실험적인 꿈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작품이 만들어지면 뭐하나, 정작 그 작품을 봐줘야 할 사람은 여기 없는 것을. <눈물>은 나쁜 아이들(?)을 위한 영화다. 하지만 정말 그 아이들이 <눈물>을 보러갈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저 평론가들, 혹은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멋진 영화라고 떠들어대겠지.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도대체 좋은 작품이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관객을 위해 만들어지고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작품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관객이란 관객을 위한 관객이 아니다. 작품을 위한 관객이다. 바로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 그 작품을 위한 그 관객 말이다.

'씨네라인'도 마찬가지다. 씨네라인이 다른 여타 사이트에 비해 볼품 없어보여도 좋은 것은, 씨네라인의 컨텐츠를 읽어줄 사람들의 눈이 꾸준히 없는 듯하면서도 거기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 아닐까.

난 씨네라인에 실리는 기사들의 조회수가 10000을 돌파하고 계속해서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야 함께 만들어가는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테니까.

자유롭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풍부한 사이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세울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꿇리지도 않는 우리. 최고의 효율로 비효율을 다듬어가는 우리. 글쓴 이들의 생각이 묻어나는 사이트. 그런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씨네라인을.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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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ers' Comments

	sanity군에게. lilactea(김관식) - 2001/01/01

	lilactea군입니다. 오래 소식없었던 것은, 연애하기에 바빴기 때문이고 영어배우러 와있으면서 한국에서보다 떨어진 토익점수에 조금 열받아 공부좀 해보겠다고 설쳤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매일 레코드가게를 해매다니고 친구들을 만나 영화보고 핫초컬릿 마시기에 여념 없었기 때문이었네. 잘 있는건지 모르겠군. 자네 이번글은 아무래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네만. 조금은 자네답지 않게 주눅들어있는듯 해서 기분이 그렇게 좋지많은 안네. 돌아가서 보세. 특별히 뭔가 선물을 해주고도 싶지만, 자네보다도 아는게 없는 내가 선듯 자네를 위해서 집어들 수 있는 것들이 없음을 용서해주게. 아마도 올해의 음반따위? 후훗. 12일 새벽에 서울도착이니 조만간 만나서 맛있는 밥이나 맛없는 술이나, 뭐 그런걸 함께. ^^ 새해에도 멋진 양군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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