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콤한 인생> 복수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
양유창 | 2005년 03월 27일
조회 8301
1. <올드보이> 이후
한국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준 영화들이 몇 편 있죠. 과거 <오발탄>이나 <하녀>, <어둠의 자식들>, <애마부인>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며 새로운 영화경향을 만들어낸 작품들 말입니다. 20세기말에는 <쉬리>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 장을 열더니 21세기초에는 <올드보이>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듯하군요. 확실히 요즘 속속 발표되는 한국영화에는 <올드보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주먹이 운다>는 대놓고 최민식과 오달수의 격투씬을 담았고, <달콤한 인생>은 <올드보이>와 비슷한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올드보이>와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올드보이>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한국영화의 에너지가 있고, 이 에너지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지속시키는 힘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매번 다른 장르영화를 완성도 높게 만들어왔던 김지운 감독의 4번째 장편 <달콤한 인생>은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조직에 맞서 싸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얼핏 보면 <펄프 픽션>의 한 에피소드를 확대한 것 같기도 하지만, 영화는 타란티노처럼 장난치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철저히 정공법으로 한 남자의 심리상태를 그리는데 주력하고 있으니까요.
2. 알랭 들롱의 페르소나
<달콤한 인생>의 카메라가 시종일관 숭배하는 선우 역의 이병헌을 보고 있노라면 알랭 들롱이 떠오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권투연습을 하는 그의 모습은 전성기때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과 거의 똑같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삽입된 장면으로 보이는데요. 아마도 김지운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계기인 장-피에르 멜빌 스타일의 영화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 같습니다.
장-피에르 멜빌은 죽기 전 세 편의 영화에서 알랭 들롱을 캐스팅했죠. <사무라이> <암흑가의 세 사람> <검은 돈>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멜빌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리노 벤추라와 함께 알랭 들롱은 멜빌의 페르소나로 각인되었고, 멜빌을 숭배한 오우삼에게 알랭 들롱의 역할은 주윤발이 이어받기도 했습니다.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은 멜빌 스타일로 그려낸 복수극입니다. 항상 분위기로 말을 하고 잔뜩 멋을 부린 액션, 카메라 움직임이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느끼게 해주는 스타일. 여자의 등장은 최소화되어 있고 차가운 남자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하지만 김지운은 김지운입니다. 멜빌 스타일의 차가움과 냉혹한 분위기를 기저에 깔고, 강인한 알랭 들롱의 이미지를 유약해보이는 이병헌에 주입시키면서도 영화 곳곳에는 김지운 특유의 유머가 넘칩니다.
영화는 선문답을 읽어주는 이병헌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닌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그리고 한 남자가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줍니다. 보스의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남자. <올드보이>처럼 아주 사소한 실수가 관계의 단절을 불러오고 결국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복수를 다짐한 이병헌은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거지?" 영화는 절대로 직접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신민아의 첼로 연주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을 수도 있고 그녀가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에 가슴이 요동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동안 자신이 강하다고 믿어왔던 그가 인정하기에는 너무 약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멜빌의 알랭 들롱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복수를 감행하는 것처럼 이병헌 역시 자신의 목숨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알베르 까뮈가 [이방인]에서 살인 충동을 햇빛으로 묘사한 것처럼 <달콤한 인생> 역시 인과관계가 배제된 살인이 춤을 춥니다. 오달수와 에릭의 존재감은 이처럼 불연속적인 플롯을 매끄럽게 처리해주는데 햇살처럼 빛납니다.
3. 달콤한 인생
역설적인 맥락에서 사용된 영화의 제목이자 총격전이 벌어지는 바의 이름인 <달콤한 인생> 혹은 'La Dolce Vita'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60년작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에 자주 꼽히는 이 영화 역시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의 내러티브를 암시해주고 있네요. 한 여자에게 매혹당한 남자가 파멸에 이르는 과정 말입니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유쾌한 감독이었던 페데리코 펠리니와 가장 폭력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멜빌의 스타일이 결합되었으니 김지운 감독이 스스로 이 영화를 '우아르'로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장화, 홍련>의 감독과 <스캔들>의 프로듀서가 의기투합한 만큼 이 영화의 미술, 세트는 그 자체로 보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총기 사용이 비현실적인 한국에서 러시아식 총기류의 불법매매를 선택한 것도 이 영화에서 유일한 유머러스한 장면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네요.
이병헌의 연기는 좋습니다. 강인함과 유약함을 모두 드러내면서 멋진 외모까지 아낌없이 뽑내고 있습니다. 김영철, 김뢰하, 황정민, 오달수, 이기영, 김해곤 등 훌륭한 조연들의 연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데, 특히 그중 건들건들하는 황정민을 언급하고 싶군요. 한국영화에서 가장 독특한 악당 캐릭터가 탄생한 것 같아 벌써부터 흥분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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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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