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먼 스테인> 에스코피에에게 바침 :::
양유창 | 2004년 02월 22일
조회 9345
<휴먼 스테인>은 2004년 오스카를 겨냥한 영화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이런 영화들이 미국에서 개봉하게 마련이다. 퓰리처상 받은 소설 각색해서 영화로 만드는 작업 말이다. 괜찮은 감독에 그럴듯한 배우 모아 놓으면 각색상 하나 쯤은 따논 당상이니까. 또 모르지.. 운 좋으면 감독상까지 거머쥘 수 있을지..
영화가 끝나고 In Memory of Jean-Yves Escoffier (1950~2003) 라는 자막이 나왔다. 이 자막을 보는 순간 여러가지 생각들이 밀려왔다. 장-이브 에스코피에..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에스코피에의 팬일 것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그가 촬영한 영화들을 많이 봤을테고 또 몇몇 영화는 자신의 베스트 영화에 꼽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
"레오 까라, 드니 라방, 그리고 에스코피에는 1984년 <소년, 소녀를 만나다>라는 영화를 같이 만들때 마치 삼형제 같았다" 라는 기사를 나는 아주 오래전에 [로드쇼]라는 잡지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셋 모두 키가 작고 통통해서 영화 촬영장에서는 오히려 정상적으로 키 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였을 지경이라고 했다. 에스코피에는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을 레오 까라와 같이 만들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헐리우드에서 앨리슨 앤더스, 마틴 스콜세지, 구스 반 산트 등과 작업했다. 엄밀히 따지면 앨리슨 앤더스와는 헐리우드에서 작업한 것이 아니지만...
대충 짚어보자면 <크로우 2>, <그레이스 오브 마이 하트>, <검모>, <굿 윌 헌팅>,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하는 미국 영화기행>, <크레이들 윌 록>, <너스 베티>, <15분> 그리고 <휴먼 스테인>과 <2046>으로 이어진다. <2046>은 왕가위가 아직 제작중인 영화로 촬영감독은 에스코피에에서 크리스토퍼 도일로 바뀌었다.
그가 죽었다. 2003년 4월 1일 심장병으로 죽었으니 거의 1년이나 지난 셈이다. <휴먼 스테인> 덕분에 나는 그가 촬영한 영화를 되짚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을 씨네하우스에서 보면서 불꽃놀이 장면에서 가슴이 너무 뛰어 미칠 지경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재수하던 시절, 화질이 누더기 수준인 비디오로 확인한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좁은 TV 화면 탓에 큰 감흥을 받지 못했지만 <나쁜 피>는 단연 최고였다. 데이빗 보위의 'Let's Dance'와 함께 포효하는 듯 질주하는 드니 라방을 나는 몇 번이고 돌려보곤 했다.
이후 레오 까라가 90년대 초반 국내에 불어닥친 영화의 홍수 속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을 때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장-이브 에스코피에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그는 레오 까라의 마술을 필름에 기록해낸 사람이었다.
소위 '누벨 이마주'라고 불리웠던 80년대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의 한복판에 있었던 그... 그러나, 그는 누벨 이마주의 사망과 함께 곧 잊혀지고 말았다. (재미있는 것은 레오 까라가 자신의 이름을 '레오스 까락스'로, 미국식으로 불러달라고 말했다는 것과 당시 평론가들이 누벨 이마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헐리우드에서 에스코피에의 필모그래피는 나쁘지 않지만, 프랑스 시절에 비하면 초라해보인다.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하는 미국 영화기행>이라는 영화 탄생 100주년 다큐멘터리만이 유일하게 가치있는 작업인 듯하고, 나머지 영화에는 그다지 인상깊게 평가할 만한 장면이 없다. 스콜세지의 경우, 아마도 에스코피에의 감각을 높게 산 스콜세지가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그에게 맡겼을 듯한데, 이 다큐멘터리는 자료화면과 스콜세지의 인터뷰 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고 곳곳에 유머와 재치가 번득인다. 스콜세지가 등장하는 장면의 배경이 온통 검은색 뿐인데도 말이다.
촬영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하지만 이 영화보다 그가 더 분량을 많이 차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휴먼 스테인>은 사실, 당신이 보기 전에 생각할 수 있는 영화의 수준을 유지하는 영화다. 안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 그리고 게리 시니즈와 에드 해리스, 여기에 미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재인 인종차별 이야기가 잘 버무려져 있다. 요리는 깔끔하면서 잘 정제되어 있어서 먹기 편하다. 가끔 스페셜 요리도 나오는데, 예를 들면 34살의 인생 포기자로 나오는 니콜 키드먼과 꿈많은 덴마크계 여대생으로 나오는 재신다 바렛의 올누드 스트립쇼가 그것이다.
평균연령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진 오스카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한 노인이 운좋게 젊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는 로맨스에 대리만족을 느낄 것이고, 니콜 키드먼의 누드에 군침을 흘리다가 영화가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에 감동받아 흡족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정말 완벽하지 않은가! 오스카를 겨냥한 이런 영화는 오스카 분위기로 비평해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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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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