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인의 추억><와일드 카드> 닥치는 대로 죽인다 :::
현실과 영화에서 폭력의 악순환
양유창 | 2003년 05월 19일
조회 8693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두 아이의 엄마, 새벽에 일찍 일어나 교회 나가는 할아버지, 술에 만취해 거리에서 토하는 아저씨, 밤거리를 걸어 다니는 아가씨, 그리고 남편을 마중나간 부인,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여학생 등. 그들은 모두 혼자였고, 아무 이유 없이 맞아죽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모습인가?
<살인의 추억>과 <와일드 카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이 두 편의 영화는 아무나 닥치는대로 죽이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 편은 80년대 동네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한적한 마을에서 한 편은 현대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에서.
<살인의 추억>은 만듦새가 뛰어난 영화이고, <와일드 카드>는 호흡 조절이 불안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나는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그것은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착잡함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의 범인은 여자만 골라 죽인다. 처음에는 젊은 여자였으나 나중에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구별도 없다. <와일드 카드>의 범인은 어떤가? 길 가던 사람을 아무나 퍽 쳐서 죽이고 금품을 빼앗는 일명 '퍽치기'들이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범행 대상 역시 부녀자, 노인, 술취한 남자 등에 한정되어 있다. 육체적인 힘이 약한 자에게 행해지는 이런 비겁함이 같은 수컷인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익숙해진 풍경이라고 말하기에 스크린에 비친 그들의 범행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한국영화에서 지금까지 이런 소재의 영화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인과관계와 치졸한 범행동기에 의해 관련있는 자를 죽이거나 혹은 제한되고 고립된 공간에서 안면 없는 자를 죽이는 범행은 있었지만,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 여러 명을 닥치는대로 죽이는 경우는 없었다. <여고괴담>이나 <폰> 등 공포영화들조차 익명성에 담보한 살인을 행하면서도 인과관계를 만들면서 원인을 파헤친 것과 달리 <살인의 추억>과 <와일드 카드>는 왜 그들이 범행을 저질렀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살인의 추억>은 실제사건을 영화화했으니 범행동기를 알 수 없다고 쳐도, 픽션인 <와일드 카드>에서는 기껏해야 패거리 중 한 명의 가정이 몹시 불우했다는 것 정도만 밝혀질 뿐이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자. 신하균은 어린 시절이 불우해서 납치 범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영화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데 성심을 다한다. 그래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객은 동화되고 심지어 연민의 정까지 느끼게 된다. 또 <주유소 습격사건>은 어떤가. 주유소를 털려는 이들에게 명목상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그냥"이다. 하지만, 영화는 억지로라도 이유를 집어넣는다. 네 명 모두 그렇게 된 과거가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관객은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와일드 카드>에서 범인은 '그냥' 범행을 저지르고 형사는 '그냥' 잡는다. '마누라'라고 불리는 파트너와 티격태격하면서 범인을 잡기 위해 '과거가 있는 자들'을 소집해 그들이 범인을 대신 잡게 만드는 것은 그럴듯한 아이디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와일드 카드>가 형사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그렸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관객 대다수가 경찰 지망생이 아니라면 경찰생활 보다는 범인이 어떤 놈인지에 더 관심이 쏠릴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긴머리를 휘날리는 범인의 '후까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고, 그가 어떤 놈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거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공공의 적>을 보자. 경찰과 범인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놓고 범인을 때려잡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면에서 <와일드 카드>와 무척 비슷한 영화다. 범인은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범할 정도로 악질이었지만, 그래도 닥치는 대로 죽이고 흔적을 지워버리는 '퍽치기' 일당처럼 제정신이 아닌 놈은 아니었다.
<살인의 추억>에 대해, 소재에 비해 너무 가볍게 그렸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일고 있다. 영화적 상상력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피해자를 생각할 때 일면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다. 영화가 모방범죄를 부른다는 기독교적인 지적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폭력적인 이미지가 어두운 사회를 미래에 더 어둡게 할 수도 있다는 우울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다. <와일드 카드>의 무분별한 범죄가 단순히 영화적 상상력 만으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건들이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볼링 포 콜럼바인>의 마이클 무어의 말처럼 잔인한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은 사회보장제도와 빈부격차 등에서 찾아야지 애꿎은 영화를 탓할 바는 못된다. 오히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예컨대 유럽영화와 미국영화를 비교해보자. 유럽영화에서 기이한 강도행각이 벌어지는 경우를 나는 그다지 보지 못했다. 그나마 헐리우드에 대항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프랑스식 액션 영화들 외에는 한 두 사람의 죽음에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특히 북유럽의 영화를 떠올려보라. 이들 나라는 일 년에 몇 편 만들지도 않지만, 만드는 영화들 면면이 과거 세계대전 시대 이야기나 흥미를 끌만한 자극적인 로맨스 영화 정도다.
반면 무고한 강도살인의 왕국인 미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소위 헐리우드 영화들 중 '가족'을 다루지 않은 영화가 없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은 대부분 가정환경이 잘못된 탓이고, 범죄자들은 선량한 가족을 파괴하는 악의 무리들이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사건이나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현실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고 그것은 영화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폭력의 강도는 점점 높아져 왔다. 대중이 원하는 자극의 강도가 점점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폭력의 강도가 세지고 있다는 말도 된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폭력 이상을 영화에서 요구하는 대중 앞에서 영화는 더이상 순진하게 범행동기 따위를 추적할 필요를 못느꼈을 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한국사회의 빈부격차는 예년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고 있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익명성에 갇혀 서로를 두려워할 만큼 사회가 닫혀 있지 않은가? 아, 그렇다면 지금 이 영화가 무차별적으로 뒤에서 '퍽치기' 한 폭력의 강도는 앞으로 더 세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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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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