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댑테이션> 보고 싶은 자가 구하라 :::
양유창 | 2003년 05월 11일
조회 7746
당신을 걷잡을 수 없이 중독 시키는 위험한 유혹... 그 어떤 과학으로도 사람들이 난초에 관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난초는 사람들을 미치게 한다. 그래서 난초는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꽃이다. - 수잔 올리언 [난초 도둑] 중에서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이 영화를 보라. 난초 증후군이라는 게 있단다. 빅토리아 시절 유럽의 부유한 난초광들은 꽃에 대한 광기나 욕망으로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 이들은 탐험가들을 고용하여 지도에 나와있지 않은 이국의 땅으로 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난초를 찾아 오는데 혈안이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아름다운 난초 모양에 대해 거의 성적 욕망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을 보이는 것이 현대의 '난초 증후군'이다. 서양란에는 약 3000종의 다양한 종자들이 있는데, 30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난초를 키우고 있고, 그 중 30만명 이상이 광적인 수집가들이라고 한다.
단지 난초를 고고하고 기품 있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던 나는 이 영화가 무척 지루했다. 세상에 난초를 찾아 헤매는 여행이라니! 왠지 동양적인 채색수묵화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지만, 당신이 만약 위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나처럼 지루해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당신은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가?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해 찾아보는 편인가? 내 생각에 이러한 관객의 성향은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하다. 영화를 보기 전이라는 가정 하에 글을 쓰는가, 영화를 보았다는 가정 하에 글을 써야하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 써야하고 어디까지 이야기해야하고 또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문장을 다듬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각자의 성향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쓸 때도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타협점을 찾거나 혹은 한 가지 경우만을 한정해야 한다.
이 글을 영화평에 대한 고찰로 시작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영화 만들기에 대한 고찰이기 때문이다. 누가 과연 이 영화에 흥미를 가질 것인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전국 난초협회 회원? 니콜라스 케이지 팬클럽? <존 말코비치 되기>를 재밌게 보았던 영화광? 혹은 이 영화 저 영화 가리지 않는 잡식성 영화팬? 장-뤽 고다르가 스스로 자신의 두번째 데뷔작이라고 불렀던 영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라는 말처럼 영화 역시 보고 싶은 자가 찾아 나서야 한다.
영화의 대중성과 작가정신에 대해 고민하는 시나리오 작가를 다루는 이 영화는 대중성과 예술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거나 혹은 잡지 못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베를린 영화제가 상을 주는 방식을 믿지 말라. 이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상업적이다. 또 박스오피스가 여러분의 사고방식에 씌우는 그 강박관념을 믿지 말라. 흥행한 영화가 당신이 보아야 할 영화의 체크리스트에 올라야 할 필요는 없다. 판단은 순전히 관객인 당신의 몫이다.
 나의 경우에, 이 영화는 무척 소비적인 영화로 보였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러 갈래로 돌아서 우회적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정작 다다른 그 목적지에는 이미 너무나 뻔하게 알려진 질문이 있다. 즉 예술인가 대중인가에 대한 고민. 뻔한 질문 뒤에 경종을 울려줄 색다른 장치도 없다. 따라서 소재는 그리 생산적인 것이 아니었고 러닝타임은 의미 없이 느껴진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고민은 로버트 알트만이 이미 <플레이어>에서 세심하게 파헤친 바 있어 새롭지 못했고, 극중의 극 형식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인 '난초 도둑' 이야기도 난초에 대해 무지한 탓에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대머리인 외모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심한 남자 찰리 카우프만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쓴 용기는 백배 칭송하지만, 그 설정 하나만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메릴 스트립, 크리스 쿠퍼 등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흡인력이 있다고 하기에는 영화가 너무 밋밋했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영화 내내 풍기는 자유로움이다. 기발하고 유쾌한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두루 받은 감독의 두번째 작품이기에 간섭받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었다. 가령 먼 옛날 지구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찰스 다윈의 진화론도 자연스럽게 인용해보는 식이다. 가장 공을 들였을 법한 CG는 찰리 카우프만과 반대되는 지점에 가상의 쌍둥이 형제 도널드 카우프만을 설정하여 자연스럽게 그린다. 쌍둥이 형제를 니콜라스 케이지가 1인 2역으로 연기하고 있는데 영화의 주제를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마도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부분은 모션 컨트롤과 그린스크린 작업 등이 필요한 이 1인 2역 장면들일 것이다. 그동안 뉴욕 토박이 감독 겸 배우 우디 앨런이 카메라 트릭을 통해 1인 2역을 하면서 고군분투한 것과 달리 뉴욕의 영화 제작자들은 이런 식으로도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이것은 감독이 뮤직비디오 출신인 탓에 CG만을 고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판단이 효과적인 것이었는지는 관객들이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영화의 주제곡처럼 영화와 관객이 '해피 투게더' 하기는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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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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