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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변신은 유죄? :::
양유창 | 2001년 08월 07일
조회 8263
흠. 도대체 무슨 글을 쓰려고 저런 제목을 달아놓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조금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오늘 삼성프라자에 갔었다. 한국 브랜드 중 가장 잘 알려진 기업답게 삼성프라자는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잘 되어 있는 곳 중 하나이다. 한국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 나름대로 좋은 인상 정도는 가질 만하게 꾸며져 있다.
1. 박물관
삼성프라자 한구석에 로댕 갤러리가 있다. 예전에 신문에서 로댕의 [지옥의 문]이라는 진품을 구입해서 전시해놓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던 터라 내심 궁금하기도 해서 한 번 들어가보았다. 정말 입구에는 [지옥의 문]과 [깔래의 사람들](제목이 확실치는 않음)이라는 조각상 두 개가 버티고 있었다. 프랑스 깔래에 대한 추억(?)도 있고 하여 조각상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본 전시인 '왕두: 일회용 현실' 전시관에 들어갔다.
미디어를 주제로 한 미술작품이라는 설명에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입장하였지만, 정말 본전시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아니, 실망이라기보다 사실 본 게 별로 없었다. 갤러리라고 하기에 동네에 집을 개조해서 만든 미술관보다 더 규모가 작았으니 단지 대학교 강의실 만한 공간을 한 번 휘릭 돌고 오면 끝이었다.
게다가 '왕두'의 작품이라는 것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중국인 작가인 그는 그저 6,70년대의 서구작가들이 해놓았던 것을 흉내낸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로댕 갤러리를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갤러리에 대한 실망감과 더불어 전혀 기다리지 않던 비까지 퍼부어대니 텅빈 지갑(사실 갤러리 입장료는 남아있던 오늘의 전재산이었는데)과 왠지 모를 억울함이 망가진 우산 사이로 넘실거렸다.
호암아트홀로 가기로 했다. 로댕갤러리 티켓에 호암아트홀의 '분청사기' 전시 무료입장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별로 거리낌 없이 이렇게 생각나는대로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라고 스스로 반문하며 빗속을 걸었다. 비가 너무 많이 온 나머지 10분거리인 두 미술관 사이를 걷는데 바지가 완전히 축축해졌다.
다행히도 분청사기 전시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호암아트홀이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아담한 전시를 치르기에는 제법 괜찮아 보였다. 마침 갤러리에서 가이드 투어가 시작됐고 나는 설명을 해주는 안내원을 따라 분청사기의 새로운 멋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안내원은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학생이라는데 너무나 친절하게 분청사기의 제작기법과 종류 및 특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대학생 정도로 나이든 남자는 나밖에 없었고 대부분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 그리고 초등학생의 어머니들이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기에 마치 여선생의 뒤를 학생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 |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난 유럽에 있는 동안에도 갤러리나 박물관에 많이 가봤지만, 거기에서는 유독 한국 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박물관이나 갤러리, 그리고 특별한 관광명소에서는 끊임없이 들을 수 있는 한국인들(특히 한국 대학생들)의 한국말이 일상생활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유명한 관광지를 이리저리 바쁘게 정해진 코스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영국박물관이나 윈저캐슬의 왕실갤러리 등에서 마주쳤던 한국에서 온 대학생들 생각이 났다. 왜 그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관심도 없던 박물관 투어를 유독 유럽에서는 그처럼 줄기차게 다니고 있는 걸까? 왜 그 친구들을 이런 곳에서는 볼 수 없는걸까?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박물관이라는 데가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여기나 거기나 별로 재미가 없는건 마찬가지다. 중고등학생 시절, 박물관, 갤러리에 억지로 끌려다니며 숙제하는 아이들은 여기에도 있고 유럽에도 있다. 단지 유럽에서는 선생님이 직접 작품 앞에서 아이들과 토론수업을 벌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반면, 한국의 아이들은 노트를 들고 명판을 베껴가는 데 급급하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인 것이다.
도대체 왜 한국의 대학생들은 유럽 관광을 가서 박물관과 갤러리를 놓치지 않는 모범생들이 되는 것일까? 모두들 역사와 예술에 조예가 깊고 관심이 많은 것일까? 그렇다면 왜 국내의 크고 작은 갤러리들에서는 대학생들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래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또하나 남겨준 셈이 됐나? 알 수 없다.
2. 세이 예스
사실 처음 삼성프라자에 갔던 이유는 그곳에 있는 '씨넥스'라는 극장에서 <세이 예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약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첫 장면을 놓치긴 했지만, 영화는 그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스릴러였다. 간혹 어울리지 않는 대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집중하고 공포를 느끼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만들어졌다. 박중훈의 연기변신은 나쁘지 않은 정도. 오랜만에 영화에 등장한 추상미는 마지막 장면에서 황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전까지 제법 겉멋든 프랑스어를 유치하게 구사하는 신혼 아내의 역할에 잘 어울린다. 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김주혁이다. 그의 경력은 잘 모르지만, 낭만적인 남편의 모습과 이중인격적인 마지막 모습, 그리고 '예스'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 인상적이니까.
3. 멋진 신세계
최근에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었고, 요즘에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있다. [섬]은 별로였고 [멋진 신세계]는 제법 흥미있어지는 부분에 와 있다. [섬]에서 유일하게 내가 마음에 드는 부분은 번역자인 김화영씨가 쓴 '옮긴이의 말'이다. 그동안 김화영씨가 번역한 프랑스 소설이나 에세이집을 많이 읽은 것 같은데(솔직히 몇 권을 번역하셨는지 잘 모르지만), 그래서 김화영이라는 이름은 내가 프랑스책을 고르는데 있어 '보증수표' 같은 것이다. 한석규를 흥행의 보증수표라고 하는 것처럼, 김화영은 책을 읽고 시간낭비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번역계의 보증수표인 것이다.
그가 쓴 [섬]의 번역후기 '글의 침묵'은 정말 멋지다. 나는 알베르 까뮈가 쓴 서문보다 오히려 김화영씨의 글에 더 감동받았다. 그에 비하면 장 그르니에의 섬과 고양이와 인도에 관한 에세이들은 그저 부록이었다. 여기 내가 좋아하는 몇 문장을 옮겨본다.
"정성스러운 종이 위에 말없는 장인이 깍은 고결한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찍히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프랑스 문학으로 일생을 살아온 그의 순수함이 담겨져 있는 글의 맺음말에서 그는 전혀 다른 언어들이 감동을 이끌어내는 순간의 침묵을 번역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너무 감동적이라 난 여기까지 읽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장 그르니에의 부록으로 들어갔었다.
한 마리 고양이의 죽음, 어떤 백정의 병, 꽃의 향기, 지나가는 시간의 이야기.
도대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기는 한 것일까?
PS) 돌아오는 길에 남대문을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처음으로 남대문을 자세히 관찰해보았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남대문의 지붕의 모양새라든가 기와에 새겨진 무늬 이런 것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특히나 재미없는 주위의 고층빌딩에 비하면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또 지하철, 갤러리 이런 곳에서 예쁜 여자들을 많이 보았다. 기뻤다. 프랑스의 몇몇 갤러리에서도 예쁜 여자들을 많이 보았었는데 마찬가지로 즐거웠었다. 나라는 인간은, 예쁘고 좋은 거면 다 좋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남자가 아닐까 싶었다.
PS) 오늘은 제 양력생일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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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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