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천/사체유기/기억/침묵/그리고 나서.. :::
양유창 | 2001년 01월 28일
조회 6770
1995년 11월 27일 마주침
그와 나는 그날 아주 우연히 마주쳤을 것이다. 내 기억에는 없고 그의 기억에는 있는 것. 혹은 그의 기억에 없을 지라도 내가 그의 기억을 더듬어 발견해낸 그와 나의 마주침. 1995년 11월 27일 저녁 시간. 어느 술집에서였겠지.
알콜이 적당히 들어간 상태로 - 아니 난 그때 별로 술을 잘 마시지 못했으므로 술기운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 그는 나를 보았을 것이고, 나 역시 그를 우연히라도 바라봤을 것이다.
1996년 12월
그의 노트. 노트 속에서 발견해낸 그의 문장. 문장 속에 담겨진 그의 고독. 우울. 그런 것들. 우리에게는 처량해 보이지만 그에게는 아주 절실했던 것들. 그래서 삶이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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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가
어느 날 식탁에 올랐을 때,
낭만은 죽었다.
국민학교 때 짝꿍이 내 지우개를
훔쳐가는 걸 봤을 때,
낭만은 죽었다.
여름방학 숙제로 열심히 채집해 온 곤충 표본이
쓰레기장에 있는 걸 봤을 때,
낭만은 죽었다.
추억의 영화들이 지루해지고,
피튀기는 영화만 찾게 됐을때,
낭만은 죽었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천사같던 그녀가
천박하기 그지없는 욕설을
자연스레 내뱉는 걸 들었을 때,
낭만은 죽었다.
혼자 즐겁게 다니던 거리에서
더이상 외로움 밖에 못 느끼게 됐을 때,
낭만은 죽었다.
어느 날 거울을 보고
나도 늙는다는 걸 발견했을 때,
낭만은 죽었다.
이런 글을 감히 뻔뻔스럽게
남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 나를 보니,
정말 낭만은 죽었다는 걸 알겠다.
언제나 머릿 속에선 계산기가 돌아가고,
믿음보다는 의심이 앞서고,
점점 몸을 사리게 되고,
함부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겁먹은 토끼, 똬리를 튼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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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드 니로는 <택시 드라이버>에서 스크린을 보고 중얼거린다. "지금 나에게 얘기하는거야?"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만들어간다.
2000년 5월 21일
5월 21일, 그날 나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저 평범하게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고 친구 만나고 얘기하고 생각하고 웃고 혹은 힘들어하고 그렇게 살았겠지. 그날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심을 했는지 혹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망치를 들기 전의 느낌이랄까, 그런 증오. 증오라는 단어는 결코 간단하고 쉬운 단어가 아니다. 정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무언가 대단한 혐오감, 미칠 것 같은 상태와 정신마비 이런 것들이 변증법적으로 타오를 때에 나타나는 감정이 증오다. 증오는 결국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든다.
2001년 1월 27일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라는 책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자살의 동기는 밝혀지기 어려운 미로같은 정신세계인가?"
지금 그는 아마도 자살하고 싶을 것이다. 독방에 앉아서 성경을 읽으며 항소심을 포기한 채 남아있는 인생과 사형제도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추억하겠지. 그리고 한켠에서 밀려오는 후회와 살고싶다라는 생각.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느껴온 아픔과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 속에서 가장 심각했던 충격. 오직 이런 것들 안에서만 지금의 처절함마저 측량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사회가 그를 욕하고 모든 언론이 그를 매장하고 또 모든 사람들이 그를 패륜아로 취급하고 모든 가치들이 그로부터 멀어질 거라고 그조차도 생각할 것이다.
내가 어느 한 날 한 시에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남자. 오늘 그가 1995년 가을부터 1997년 봄까지 살아가면서 남겨두었던 그의 일기장과도 같은 메모들을 차근차근히 들춰보았다. 그 메모들에는 여린 인간이 느꼈을 법한 외로움과 외로운 인간이 느끼는 의사소통의 어려움, 그 어려움이 만들어내는 체념. 체념 뒤 과격한 것들에 대한 선호.. 그런 세속적인 사람들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단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한켠에는 전혀 다른 모습 또한 있었다. 한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 기쁨에 쓴 짧은 감상문, 자신을 기억하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인사, 그리고 우리가 함께 했던 그 모임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하말까지.
삶의 극한에 다다른 그는 알까. 인간은 누구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누구나 부서지지 않기 위해 서로에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섬. 그 섬에 당신을 닮은 예쁜 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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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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