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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tation of Life

크리스마스, 50년대의 로맨스 :::


양유창 | 2000년 12월 18일
조회 6834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요즘에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쓴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에 저 싯구가 있다. 소월의 시, 정지용, 유치환, 조지훈... 옛날에 국어책에서나 들어봤던 이름들. 50년대의 사랑은 어땠을까? 그때 연애를 한 커플들은 어떻게 낭만을 즐겼을까

이수자 여사는 윤이상 선생과 부산사범학교 선생시절에 만났다. 부인은 국어교사, 윤이상은 음악교사. 과묵한 윤이상은 이수자와 데이트를 하던 날 밤거리를 거닐며 저 시를 읊었다 한다. 한밤 달빛을 맞으며 시를 읊는 남자. 그 시에 반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시와 그 장소를 기억하고 있는 여자.

1950년. 잿더미만 남은 줄 알았던 그 시절에도 이 땅에 로맨스라는 것이 있었나보다.

오늘 센트럴시티 빌딩에 볼 일이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건물이며 분위기가 마치 유럽의 고급 건물에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극장 등 문화시설에서 쇼핑몰, 고속버스터미널로 이어지는 출구와 실내환경 등에서 21세기가 실감났다. 빌딩은 7호선 지하철로 이어진다. 세계 5위의 지하철 도시라는 말처럼 새로 개통한 7호선과 6호선 외부는 쾌적하다.

내부에서 내부로, 지하에서 지하로, 이동하고 움직이고, 지상과 또다른 즐거움, 지하 내부의 세계. 난 지하인이 된 듯했다.

그 지하에서, 난 50년대의 윤이상과 이수자의 로맨스를 생각했다. 폐병에 걸린 남자, 결혼반대 속에서도 사랑으로 결혼한 러브스토리. 결혼 후 터진 한국전쟁. 전쟁을 통해 북으로 가버린 문인 친구들. 예술가로서의 삶과 사랑하는 부인을 위한 삶. 그리고 그 유명한 동베를린 사건과 대한민국 비밀경찰.

내 방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윤이상의 CD 한 장. 난 사실 그 음악을 들어도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한다. 낮게 읊조리는 현악기와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오케스트라는 나같은 음악적 범인이 듣기에 쉽지 않다.

그는 그런 음악을 남기고 갔다. 유럽의 음악평론가는 그를 세계가 낳은 10대 음악가 중 한 명이라고 소개한다. 바하, 모짜르트, 베토벤, 바그너로 이어지는 그 10명의 이름 중에 윤이상이 있다.

내가 윤이상을 처음 안 것은 그가 죽은 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전까지, 난 윤이상이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때 읽었던 어떤 책에서 윤이상이란 이름이 음악가라기 보다는 한국역사의 희생자로서 소개되어 있었다. 그뒤 그는 동베를린 사건 이후 귀국하지 못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독일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언론은 그에 대해 비운의 거장이라 칭했다.

새천년의 크리스마스 앞에서 나는 왜 윤이상과 그의 로맨스를 떠올렸을까. 난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았던 사람이다. 내 표정이 시니컬해졌던 스무살 때부터 갑자기 바뀌는 일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권을 좋아하지 않았고 민주노동당보다 DJ를 찍었다.

지금도 그건 그렇다. 갑자기 바뀌는 것은 의심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조금 다르다. 어느날 내가, 내가 속해있는 이 사회가, 이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서 등돌리고, 나를 쫓아낼 때, 그때는 어쩔 수 없다. 나도 바뀌어야 한다. 스스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윤이상은 스스로 운명을 바꾼 사람이다. 그래서 수많은 유럽의 관객 속에서도 조국을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50년전의 윤이상을 생각한다. 그가 순수함을 간직하고 묵직한 무게감 속에 100번의 뽀뽀 같은 천진함을 입가에 띄고 있던 50년전, 아버지 세대를 생각한다. 나도 그때의 로맨스를 해보고 싶다. 크리스마스는 따뜻한 날이다.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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