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효과> 깨어있으라 :::
양유창 | 2004년 11월 16일
조회 7610
"Wachet Auf !, Ruft Uns Die Stimme 깨어있으라, 우릴 부르는 소리 있나니.."
- 1731년 바흐 칸타타 BWV 140번 곡의 제목
눈떠라, 진실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베이징의 나비의 한 번 날개짓이 미국 뉴욕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는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tz)가 1961년 기상관측을 하다가 떠올린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자들에 의해 카오스이론으로 발전했습니다. 불규칙해보이는 현상 속에도 인과관계와 규칙이 있다는 것이지요.
<나비효과>는 이 이론을 액면 그대로, 하지만 아주 단순화시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인과관계에 의해 변화하기 때문에 현재를 바꾸고 싶다면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을 바꾸면 된다는 것이죠.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를 논했던 장자의 '호접몽'이 인간을 객관화시키며 존재에 대한 고민을 질문했다면, 이 영화는 인간을 모든 사고의 중심에 둔 다분히 서양적인 세계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에반은 아버지의 유전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타고난 아이입니다. 툭하면 갑작기 기억을 잃었다가 잠시 후 깨어나기 일쑤였죠. 그때마다 그의 주변에는 기이한 상황들이 많이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은 에반을 어떤 정해진 미래로 이끕니다.
이제 성인이 된 에반(애쉬튼 커처)은 자신이 써놓았던 일기장을 볼 때마다 과거에 잊혀졌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릴 때 그 과거에 자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해 과거를 다르게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바로 '하나를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는 나비효과를 단순화시켜 한 남자의 인생에 대입한 것이죠.
"그때 이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막연하게 한번쯤 해보는 질문을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혹은 자신 때문에 피해당한 친구들과 연인을 위해서... 그동안 영화 속에서 이런 상상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난니 모레티가 <아들의 방>에서 아들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빠져 다양한 상상을 해보는 것이나 <슬라이딩 도어즈>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와 타지 않았을 때 서로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것, <레트로액티브>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20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심지어 <터미네이터> 역시 과거를 변화시킨다는 측면에서는 같죠.
한때 인기있던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인생극장]이나 [래리] 같은 옛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에서 경우에 수에 따라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지금 행동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혹은 과거를 바꾸면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봅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꾸되 모든 사람이 다 그럴 수 있다면 영화는 너무 복잡해지겠죠. 따라서 영화는 기억력과 정신적 유전이라는 장치로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합니다. 단 두 사람, 에반과 그의 아버지에게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주변인물의 운명을 바꿉니다. 마치 신과 예수를 닮았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과거가 바뀌고 자동적으로 현재가 바뀔 때마다 영화는 심리 스릴러, 멜로드라마에서 SF까지를 오갑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적 변주가 가능한 영화는 만드는 입장에서 아주 즐거웠을 것 같군요. 아주 실망스러웠던 <데스티네이션 2>의 각본을 함께 섰던 에릭 브레스와 J. 맥키 그루버가 공동으로 각본을 담당하고 연출까지 겸했는데요, <데스티네이션 2>의 상투성은 사라진 대신 긴박감이 넘치고 관객을 영화 속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의 애쉬튼 커처, <로드 트립>의 에이미 스마트, 그리고 잠깐 출연하는 <펄프 픽션>의 에릭 스톨츠까지. 호화캐스팅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각각의 배역에는 잘 어울립니다. 특히 럭셔리 대학생에서 창녀까지 역할을 소화하는 에이미 스마트가 가장 놀랍습니다.
미국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반응은 썰렁했다고 하는데요. 뉴욕타임즈의 데이브 커는 "1월은 영화사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쓰레기같은 영화들을 한꺼번에 배출하는 달이라고 해도 이 영화는 어마어마한 졸작이다"라고 공격했고, 뉴욕포스트의 루 루메닉은 "시종일관 멍청하고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이 영화는 '너무 형편없어서 재미있는 영화'로 분류될 만하다"고 비꼬았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들 평론가들은 영화를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 같군요. 비록 이 영화가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또 '나비효과'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논리적 비약이 군데군데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힘이 넘치고 또 긴장감이 살아 있습니다. 에반이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맞이할 때, 감옥에서 고통받을 때, 또 불구의 몸이 될 때 객석에서는 "어서 빨리 과거로 돌아가서 바꿔버려!" 하는 외침이 들리는 듯 하니까요.
PS)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헐리우드 영화의 어쩔 수 없는 해피엔딩 성향을 감안한다고 해도 약간 실망스럽습니다. 영화 첫 장면에서 보여줬던 '사느냐 죽느냐'의 긴박함이 단번에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DVD의 감독판에서는 최초의 태아상태로 돌아가는 엔딩이 있다고 하니 기대를 해보는 수밖에요. 그나저나 이렇게 자주 감독판이 출시되는 지경이라면, 이제 영화를 보려면 극장에서, 또 DVD로, 같은 영화를 두 번 봐야한다는 것인가요?
|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
|
국가별 검색
가격대별 검색
국가별 검색
가격대별 검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