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슈프리머시> 유럽횡단 롤러코스터 :::
양유창 | 2004년 08월 06일
조회 7978
어느날 한 남자가 해변가에서 깨어났는데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능숙한 외국어 실력이나 유연한 몸, 살 속에 감추어진 비밀번호 등 뭔가 특별한 일을 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던 그 남자는 CIA와 군대가 자신을 쫓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스파이'라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매혹적인 스파이 캐릭터를 창조해낸 로버트 러들럼의 '본' 3부작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은 원래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영화화된 이 첩보 시리즈는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냉전시대의 단순한 대결구도보다는 뛰어난 스파이의 적이 결국 자신이라는 이 이중적인 구성이 요즘 관객들에게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올테니까요.
헐리우드는 냉전시대 종식 이후 액션영화의 적을 돈만 밝히는 대기업으로 설정하거나 혹은 내부의 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는 '내부의 적'을 더 교묘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스파이 자신이 바로 적이 되는 모호함을 택합니다.
어두웠던 과거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자신이 킬러였음을 알게된 스파이는 이제 속죄하기 위해 자신이 죽인 부부의 딸을 찾아가 사죄합니다. 수많은 서부극에서 사람들을 죽여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한 것만큼 장엄한 장면은 아니지만, <본 슈프리머시>에서 유일하게 드라마로 삽입된 이 부분은 음미할 만합니다.
새로운 스파이물로서 <본 아이덴티티>가 주었던 매력과 그 전략을 <본 슈프리머시>는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내용은 단순해졌지만, 액션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고 핸드헬드 카메라는 더 흔들립니다. 전작을 즐겼던 관객이라면 속편 역시 만족하실 것입니다.
쫓고 쫓기는 두뇌싸움, 밀라노-베를린-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유럽횡단 추격과정, 광장에서 트램으로, 호텔에서 지하철로, 기차를 내려 카레이싱, 터널에서의 마지막 격투까지. 숨막히게 진땀나는 장면들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계속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감독이 <블러디 선데이>를 만든 폴 그린그래스라는 것입니다. 기자에서 영화감독으로 전직한 뒤 사회성 짙은 영화를 만들어오던 그가 제작자 프랭크 마샬의 눈에 띄어 헐리우드로 직행했는데요. <블러디 선데이>에서 70년대 영국 경찰과 아일랜드 시위대의 충돌을 실감나게 재연했던 실력이 <본 슈프리머시>에서 주인공 본을 마치 현장에서 보는 듯한 리얼리티로 부활했습니다.
전편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게된 본(맷 데이먼)은 이제 인도의 한적한 도시에서 연인 마리(프란카 포텐테)와 함께 숨어살고 있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한 범죄집단이 본의 지문으로 베를린에서 살인사건을 꾸미고 이에 따라 미국 CIA가 본을 추적하기 위해 나서게 되는데, 본을 미리 제거하려는 러시아 쪽에서 먼저 본을 찾아내 인도에서 추격전을 벌입니다. 이 과정에서 마리가 죽고 본은 이제 자신을 쫓는 자들을 역추적해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치 사무라이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말이죠.
전편에서 본을 도왔던 마리를 첫 장면에서 죽임으로서 영화는 전적으로 본에 의지합니다. 예전의 '007 스파이'의 매끈한 미남에서 탈피한, 평범한 동안의 맷 데이먼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통제하는 고도로 훈련된 모습으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끕니다.
그는 이런 식입니다. 공항에서 잡힌 그를 미국 영사관 직원이 취조합니다. 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왜 잡아뒀느냐는 식으로 묵묵부답입니다. 그런데 직원이 총을 꺼내는 순간 본은 잽싸게 총을 가로채 그를 쓰러뜨립니다. 그리고 그 직원의 휴대폰에서 칩을 꺼내 자신의 도청기에 연결하고 달아나면서 직원의 통화내역을 통해 누가 자신을 쫓는가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곧장 베를린으로 직행합니다.
순간을 포착해 빠르게 행동하는 이러한 추진력은 애초에 스파이 영화에 캐스팅되었을 때 맷 데이먼의 자질을 의심했던 사람들에게 한방 먹입니다. 작은 체구이면서도 강렬한 카리스마가 맷 데이먼에게서 뿜어져 나옵니다.
본을 추적하는 CIA 요원 파멜라 랜디(조안 알렌)는 본이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간적 고뇌를 하는 인물로 맷 데이먼의 무표정함을 받쳐주는 연기를 해내고 있습니다. 또,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줄리아 스타일즈나 브라이언 콕스 역시 인상이 강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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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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