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씨 9/11>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
양유창 | 2004년 07월 15일
조회 8104
올해 칸 영화제 시상식장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러 무대에 올라온 마이클 무어에게 쿠엔틴 타란티노가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죠. "이 상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주는게 절대 아닙니다. 당신 영화가 영화 그 자체로 좋았기 때문에 주는겁니다"라고요.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마이클 무어 조차도 칸 영화제가 아무런 정치적인 목적 없이 황금종려를 그에게 바쳤다고 믿지는 않았겠지요. 확실히 이 영화는 칸 영화제 덕분에 '떴고' 미국에서 와이드 릴리즈 개봉할 수 있었습니다.
<화씨 9/11>은 노골적으로 조지 부시와 그 가족 및 행정부를 바보로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가 관여한 추악한 과거들을 들춰내는 과정에 그를 골탕먹이는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가져다 붙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합리화하고 비판하려는 대상을 실컷 골려줍니다. 그의 전작인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로저와 나>를 보신 분들이라면 <화씨 9/11>을 보기도 전에 이미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저와 나>에서 GM을 상대로 했던 방식,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찰튼 헤스턴에게 했던 방식을 몇십배 확대해서 조지 부시에게 하고 있습니다.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실컷 조롱하면서도 그 방식이 논리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통렬함을 느끼게 합니다.
조지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미국 안팎에서 여러가지의 반미영화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도그빌> 같은 영화는 위선적인 마을을 미국에 대입하여 그 마을 전체를 폭파시켜버렸고요, <엘리펀트> 같은 영화는 침착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통해 미국의 가면을 벗겼습니다.
이들 영화에 비해 마이클 무어의 방식은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뒤돌아볼 것도 없이 그는 미국 내 보수세력을 겨냥합니다. 자본축적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기업의 전횡, 아이들이 총에 맞아 죽어도 꿈쩍도 않는 전미총기협회와 일부 부자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팔아버린 공화당 행정부가 그의 표적입니다.
올해 50세가 된 마이클 무어는 거침없는 스테미나로 조지 부시에게 강펀치를 날립니다. 갑자기 스타덤에 오른 것처럼 보이는 이 '무대포' 감독은 사실 몇 번의 '다윗과 골리앗' 싸움을 벌여온 전력이 있습니다. 첫 다큐멘터리인 <로저와 나>(1989년작)에서 GM이라는 공룡기업을 상대로 대기업이 자신의 고향 플린트를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날카로운 풍자로 꼬집었던 것이 그 시초였죠. 이같은 그의 코믹한 풍자와 막무가내 탐구정신은 나이키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한 <빅 원>(1997년작)을 거쳐 <볼링 포 콜럼바인>(2002년작)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1999년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을 위트와 풍자, 고발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파헤쳐간 이 멋진 다큐멘터리로 그는 일약 다큐멘터리의 거장으로 떠오릅니다. 이 영화로 자신감을 얻은 무어는 작정을 하고 <화씨 9/11>을 만들어 선거가 있는 2004년에 공개하는데요. 잽인줄 알았던 그의 주먹은 어느새 핵주먹으로 바뀌어 미국을 들끓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화씨 9/11>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시가 어떻게 대통령직을 강탈했는지. 둘째, 부시가 9/11 테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셋째, 부시의 이라크 전쟁의 피해자는 과연 누구인지 등입니다.
마이클 무어의 나레이션은 차분하면서도 가끔 흥분하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줍니다. 이전 영화들과 달리 자신이 출연하는 횟수를 최소화했는데요, 가급적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각 부분 모두에서 약간의 논리적인 비약이 보이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미국 중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열성 공화당 지지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공의 적'으로 인식하고 있을 조지 부시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같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끼리는 낄낄대면서 볼 수 있는 동지의식(?) 혹은 공동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지요.
9/11 테러가 터졌을 당시 눈만 꿈벅거리는 부시의 모습과 당시의 여러가지 정황을 교차편집해 보여주는 것이나 의원들에게 자녀를 군대에 보내라고 설득하는 장면 등은 마이클 무어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실 이 영화가 이전에 이미 알려졌던 내용에서 크게 더 나아가거나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 것은 아닙니다만, 얽히고 설킨 것들을 깔끔하게 요약 정리하고 또 "다시는 (부시에게) 속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관객들에게 확실한 프로퍼간다로 기능한다는 측면에서는 애초에 영화 이상의 무언가를 노리고 만들어졌다는 혐의에서 자유롭기 힘듭니다. 칸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도 몇몇 프랑스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9/11의 '원인'을 깊게 파헤치기보다는 조지 부시를 놀리는 그 자체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요.
<볼링 포 콜럼바인>이 총기난사사건의 원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했던 것과 달리 <화씨 9/11>은 작정하고 부시 놀리기에 러닝타임을 더 많이 할애합니다. 때로는 비판하는 대상을 너무 노골적으로 조롱한 나머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갇혀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입니다. 즉, 조지 부시가 무조건 '악'이기 때문에 그에 대항해서 민주당이나 민주당을 찍는 유권자들은 모두 '선'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이런 이분법적인 논리는 명쾌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게름칙한 뒷맛을 남깁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민주당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에 밀려 조지 부시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후 전쟁에 대한 비판여론이 쏟아지니까 민주당은 전쟁 종결로 입장을 선회했습니다. 영화 속에 민주당의 이중성이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만큼 너무 짧은 시간에 그치고 있습니다. 영화의 대부분을 부시 놀려먹기에 쏟아붓고 있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관대한 편이지요.
그밖에 부자를 위한 대통령이라든지 놀러가기를 좋아한다는 것 등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역대 민주당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무어는 이것들을 부시를 공격하는 중요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영화는 한 사람을 실컷 조롱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공화당은 나쁘고 민주당은 좋다라는 단순한 도식에 빠지고 말았지요. 사실 이런 것들을 비판의 무기로 써먹는 것은 각 선거진영의 미디어 담당자가 할 일이지, 한 사람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화씨 9/11>은 분명히 설득력 있고 미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 받는 한국인에게도 유용한 다큐멘터리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국 공화당 행정부 및 의원들을 보노라면 그들이 사익을 위해 공직을 이용하는 행위들이 한국 정치인이나 언론의 상황과 너무도 비슷해 코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또, 조지 부시 행정부의 노골적인 세뇌훈련에 의해 자행된 이라크 전쟁이 일부 부자기업들의 배를 불리는 댓가로 평범한 이라크 사람들이나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 심지어 한국인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있는 현실에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정치적인 영화 한편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지 부시 주연의 블랙코미디로 채워져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영화는 확실한 희생양과 추진력을 얻었지만 지나치게 이분법으로 도식화되어버린 측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사실 한국인 입장에서는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미국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오히려 미국이라는 나라는 사익추구집단인 조지 부시나 공화당 행정부 보다는 마이클 무어 같은 사람들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있기에 더 무서운 나라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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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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