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극기 휘날리며> 타이타닉을 떠올리다 :::
양유창 | 2004년 02월 05일
조회 8695
<태극기 휘날리며>는 아주 단순한 영화다. 그리고 굉장히 공들인 영화다. 흥행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춘 영화이면서도 대작인 티를 내지 않는 깔끔한 영화이기도 하다.
<쉬리>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사건이라고 말했다. 지금 <쉬리>는 하나의 역사로 기억된다. 한국영화의 제2전성기를 알린 신호탄이자 헐리우드를 따라잡으려는 돌파구 역할을 해낸 셈이다.
당시 사람들은 <쉬리>를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500만명이라는 흥행 기록이 앞으로 또 나올 수 있을까, 영화 한 편이 가져온 거품이 한국영화계를 망치는 것은 아닌가. 분명 맞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직까지 <쉬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한국영화의 부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엽기적인 그녀>, <살인의 추억> 그리고 <실미도>를 넘어 지금 드디어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왔다.
<쉬리>에 대해 사람들이 했던 걱정을 그대로 <태극기 휘날리며>에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영화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관객 1000만명을 겨냥한 영화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걱정은 그 강도가 <쉬리>보다 약할 수 밖에 없다. 한국영화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외국인들 또한 그 대답에 대해 낙관적이니까.
아, 돈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그건 이미 여기저기서 많이 떠들어대고 있지 않은가. 이제 2시간 20분짜리 이 영화에 대해 살펴보자.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서 나는 <타이타닉>을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아껴 보관하고 있던 구두 한 켤레는 <타이타닉>에서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던 보석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제임스 카메론과 강제규에 대한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둘 다 엄청난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때 얼마나 부담감이 컸겠는가.
구두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하기위해 이제 영화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권택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재연되던 1950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순박한 두 형제의 하루일과가 기록된다. 구두를 만드는 형과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이 아이스케키를 사먹고 국수를 파는 여자친구와 엄마에게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한밤중에 냇가에서 물장구를 친다. 이후 비극적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형제애, 사랑, 모정이 압축적으로 다이내믹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전쟁이 터진다.
자,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이 내일 전쟁을 경험하게 될 것을. 그래서 이은주가 "더도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때 다가올 비극적 상황을 예견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런 식이다. 관객은 스토리 전개를 다 알고 있다. 한국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이미 알고 있고 원빈이 끝까지 살아남고 장동건이 죽게 된다는 것도 영화 첫 부분에서 알려준다.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전개가 굉장히 빠르다. 감정의 폭발은 마지막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이 힘을 비축하기 위해 영화 초반 1시간 동안은 감정선이 뚝뚝 끊긴다. 그런데 끊기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세련되게 느껴진다. 영화 초반부터 질질 끌었다면 아마 관객은 지루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의 스케일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헐리우드 전쟁 영화에 익숙한 탓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초반 평화로운 서울 풍경이나 대구 전투 장면에서는 세트를 만들어놓고 찍었다는 것이 눈에 확 뜨일 정도로 규모가 작다. <쉬리> 때는 작은 스케일을 극복하기 위해 카메라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정신 없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트릭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전쟁영화에서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교과서처럼 쓰이는 프레임 조정 기법을 사용해 지루해보일 수 있는 전쟁 장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밖에 <에너미 앳 더 게이트>나 TV 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제목 만큼이나 이 영화는 명백히 한국의 대표영화(?)가 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영화 한 편에서 1950년대 이후 한국이 처한 상황을 압축해서 보여주려고 한 듯하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갖혀 있는 동안 TV 화면을 통해 한국(남한)의 역사가 압축되어 보여지는 것처럼 이 영화에는 남북이 처한 상황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우리가 올림픽 중계방송이나 가요무대 등에서 토속적으로 "우리는 형제"라고 말하는 그 상징성이 고스란히 이 영화에 녹아 있는 것이다. 사실 형제를 주인공으로 설정할 때부터 영화는 남과 북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전제를 둔 것이나 다름 없다. 둘은 어느 순간 갈라서고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만나지 못할 것이다.
포탄과 파편이 무수히 스크린을 피로 물들이는 가운데 이 영화의 주제인 휴머니즘이 클라이막스를 향해 진격한다. 살인 기계가 되어버린 장동건이 흰 눈동자를 부릅뜨면서 신음하는 장면에서 그 미친 전쟁의 광기는 극에 달한다. (이 영화는 장동건이 연기다운 연기를 선보인 첫번째 영화다.) 남과 북이 서로 잘잘못을 가릴 것도 없이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광기의 살육을 계속한다. 그리고 광기가 폭발할 때마다 원빈은 나약한 한 남자를 증오의 화신으로 만든 것이 전쟁 탓임을 드러내는 대사를 내뱉으며 관객에게 전쟁의 잔혹성과 가족의 파괴를 환기시킨다.
전쟁 액션과 가족 휴머니티는 이렇게 결합한다. 액션 히어로는 전쟁을 다이나믹하게 느끼게 만들고, 말 못하는 어머니와 동생들은 가족애를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다. 그래서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영화를 원하는 관객과 감동적인 서사극을 원하는 관객 모두를 만족시킨다.
국방군과 인민군이 사용하는 총기에서 나오는 소리의 차이, 보도연맹 사건, 당시 트램이나 기차 등 교통수단, 학생수첩,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거리 한복판에 걸려 있는 '전쟁 종결 반대' 플래카드 등 디테일한 묘사는 이 영화가 얼마나 역사 고증에 공들이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역사책에서나 존재하던 1950년대가 스크린에 그대로 투영되어 그 시대를 경험한 적 없던 사람들에게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세대는 이 영화를 통해 한국전쟁에 대해 '실미도' 사건 이상의 충격을 경험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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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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