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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tation of Life


<도그빌> 지배하는 자의 오만함 :::


양유창 | 2003년 08월 06일
조회 8867


영화를 완벽히 통제하려는 감독들이 있다. 가까이는 스탠리 큐브릭, 제임스 카메론부터 멀게는 오즈 야스지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알프레드 히치콕, 장 르느와르까지. 이들은 영화와 인생을 혼동하였으며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하려고 하였다.

라스 폰 트리에스파이크 리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도전적인 감독이다. 항상 논쟁을 만들어내는 그에게는 하지만 스파이크 리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통제력이다. 그는 영화를 지배하려 한다. 지배는 복종을 낳는다. 그래서 그는 영화와 인생을 혼동하고 자신의 인생마저도 통제한다. 그리고 그 인생에 복종한다. 그는 영화가 종교라고까지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에는 종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항상 도발적인 논쟁을 걸어오는 그는 대가와 사기꾼 사이를 오가지만, 그의 재능과 종교적 믿음 속에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분류하고 배열하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은 <도그빌>을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의 '골든하트 3부작' 이후 새롭게 시작된 USA의 U에 해당하는 '미국 3부작'의 첫번째 영화라고 부른다. 혹자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 속의 댄서>와 함께 '성모 3부작' 중 하나라 부르기도 한다. 모두 천사 같이 착한 여자가 나오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그빌>은 단지 3이라는 숫자 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항상 밀어부친다. 그는 <유로파>로 칸 영화제 고등기술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데뷔하였지만, 동시에 부족한 철학으로 기교부리는 감독으로 낙인찍혔다. 그러자 그는 모든 영화적 기교를 포기하고 철저하게 인물을 파고드는 실험을 감행하였다. 그래서 <킹덤>이나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드라마에 강한 감독인지를 증명해보였다. 그의 영화세계를 들여다보면 이처럼 기술중심의 영화에서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 그리고 순수영화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그가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표한 '도그마 95' 선언은 영화의 모든 가식적인 것들을 부정하겠다는 고해성사요 10계명이었다. 이후에 그 자신이 스스로 모든 원칙을 다 지킬 수는 없다고 고백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아직까지도 10계명 중 한두가지는 꼭 지켜내고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진보하고 있다. 한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면 이전에 했던 시도는 잠시 보류하거나 후퇴시킨다. 그리고는 다음 작품에서 둘을 결합한 새로운 모델이 탄생한다. 예컨대 <어둠 속의 댄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정'으로, <백치들>을 '반'으로 놓고 그린 모형이고, <킹덤>은 <유로파>와 <범죄의 요소>가 서로 다른 비율로 마찰한 영화다. <도그빌>은 그 극단에 서있는 영화다. 내러티브 중심주의가 극에 달하고, 카메라는 별다른 기교 없이 인물 가까이서 호흡까지도 전달한다. 최전방으로 전진한 형식주의가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다가 이윽고 모두 날려버린다. 이 영화는 극단적인 형식주의와 내러티브 실험을 '정'으로 놓고 그것에 반대하는 관습적인 시선을 '반'으로 상정한 뒤 결정적인 순간 폭발시켜버리는 '합'의 영화이다. 어쩌면 그동안 라스 폰 트리에가 했던 모든 실험의 종착역이자 다음 실험이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임을 시침 뚝 떼고 예견해주는 영화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그빌>은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의 구성을 차용하고, 브레히트의 연극,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 [소돔과 고모라]의 신화, 안토니오니의 <욕망>의 주제와 잉그마르 베르이만적인 도덕성을 촘촘히 묶은 영화다. 거기에 <나이트메어>의 '엘름 스트리트'가 있고 그레이스(니콜 키드만)는 프레디 크루거처럼 등장해 잠들어있는 도그빌 주민들의 도덕성을 건드린다.

9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영화는 존 허트의 구연동화같은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느긋하게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해주는 그 목소리는 <배리 린든>의 나레이터 마이클 호던을 생각나게 하는데, 챕터 자막과 함께 앞으로 벌어질 내용을 미리 설명해준다는 점에서는 매우 브레히트적으로 들린다. 스튜디오에 분필로 그어진 선을 따라 누구네 집, 숲, 광산 등이 적혀 있다. 배우들은 마치 거기에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연기한다. 배우가 속고 있는 것인지 관객이 속고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다. 이처럼 연기학원의 워크숍 혹은 리허설 같은 장면은 그러나 놀랍게도 178분의 러닝타임 중 단 1분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꽉짜인 드라마가 반전을 거듭하며 진행될수록 아주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우가 건물을 드나들며 문 여는 시늉을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안토니오니의 <욕망>에서 주인공은 공도 없이 테니스 경기를 하는 마임이스트들을 보고 어리둥절했지만 이윽고 보이지 않는 공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같은 이치다. '보이는 것'은 곧 '보고 싶은 것'이어서 그 경계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

감독 스스로 미국을 다룬 영화라고 하였지만, 사실 <도그빌>은 아주 보편적인 인간군상에 관한 영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성폭행당하고 있는 한 정신지체 여자아이의 실상이 '도그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인간성의 실종' 그 자체다. 엔딩 크레딧에 삽입되는 20세기 초반 미국 사진첩과 데이빗 보위의 'Young Americans'라는 노래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미국이라고 단정지을 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통쾌하다. 아주 직설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마을을 현재의 미국에 대입하면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이민자의 나라가 이민자를 배신하는 역사나 꽤나 도덕적인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계산 다하는 톰 에디슨(톰 소여+토마스 에디슨의 합성 이름),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도그빌 주민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을 짓밟는 현대의 미국과 닮았다. 수줍어하며 그레이스(니콜 키드만)에게 개목걸이를 씌워주는 남자는 바로 부시 정부 내에서 시소게임을 벌이며 실속은 다 챙기는 온건파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이에는 이'로 복수하는 영화의 결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감독 자신이 이미 성녀로 최후의 죽음을 맞는 눈 먼 여자를 <어둠 속의 댄서>에서 그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단순히 일관성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의 영화는 변증법으로 읽어야 한다. 앞의 영화가 절제의 미덕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폭발의 우아함을 보여줄 차례다. 인간성의 타락을 이유로 없어진 도시 '소돔'처럼 도그빌도 성녀로부터 구원받지 못한다. 그레이스는 아름다웠던 도그빌의 풍광을 머리속에서 지우고 돌연히 자신이 얻게 된 권력으로 주민들에게 은총을 내리기 시작한다. 그 은총은 갈 데까지 가고 있는 미국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장 같은 것이다. 누가 더 오만한가를 놓고 아버지와 한참 언쟁을 벌였던 그녀가 택한 해결방법치고는 아주 오만한 방법인데, 어쩌면 감독은 이를 통해 발생할 뜨거운 찬반논쟁을 즐기는 듯하다.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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