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화, 홍련> 효순이와 미선이에게 :::

양유창 | 2003년 06월 17일 조회 7762
제1장 : 진혼곡
2003년 6월은 만감이 교차하는 달이다. 월드컵 개최 1주년이면서 효순, 미선의 사망 1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은 많이 무뎌진 것처럼 보인다. 한국 대 아르헨티나 축구경기가 열린 날 광화문은 썰렁했으며, 작년 12월 7일 시청 앞 광장에 10만명이 운집하며 절정에 달했던 촛불시위는 이번 6월 13일에는 4만여명 정도만을 참여시키며 조촐하게 치루어졌다. 언론 여기저기에서 "반미는 안된다"라거나 "촛불은 반미가 아니다"라는 보도가 잇따르며 스스로 위축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모두 환상 같은 경험이다. 우선 월드컵 때 몰려들었던 700만명의 거리응원은 일종의 환각이다. 축구가 좋아서 거리로 나왔다기보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축구를 도구화한 것이다. 따라서 월드컵이 끝나고 그 열기가 K리그와 축구붐으로 이어질 거라는 전망은 다분히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분석이었다. 누구나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은 하겠지만, 그것은 '승부욕'과 '민족의식'이 발동할 때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효순, 미선 사건도 마찬가지다. 우리 국민은 50년만에 처음으로 자주성에 스스로 눈뜨기 시작했다. '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불을 뒤짚어쓰려 하고 있다. "추모 집회는 반미가 아니다"라는 이상한 논리에 휘말려 어느새 촛불집회는 반미가 아니었다. 반미 물결 때문에 당선된 대통령이 '정치범 수용소에 안가게 해줘 미국에 감사하는' 친미주의자로 변신하고, 미국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서 반미는 안된다는 주장을 펴는 사대주의 언론에 길들여진 국민의 상당수가 마음 속에서 이미 촛불을 놓았다. 그래서 지난 13일 집회의 참가자는 대부분 특정 정당과 한총련 등 단체 소속이 많았으며, 일반 시민의 수는 작년 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효순이와 미선이는 이미 죽은 것이다.
영화는 시의성이다. 기획되고 촬영될 때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영화가 공개되면 영화는 제작진의 손을 떠나 관객의 평가를 기다리게 된다. 관객의 평가에는 순수하게 기호적인 측면 외에 사회 전반적인 변화와 궤를 같이하는 느낌도 포함될 것이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관계 변화의 시점에서 주목받았고, <살인의 추억>이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재수사 바람을 일으키는 것, <튜브>가 대구 지하철 참사 때문에 개봉일을 늦추는 것 등은 사회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영화의 좋은 예다.
그런 의미에서 6월의 영화 <장화, 홍련>의 수미와 수연은 마치 효순이와 미선이를 닮았다. 포스터에서 그들이 앉아 있는 소파는 'SOFA'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 위에 서 있는 아버지와 계모는 누구일까?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수미의 망상 속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지금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효순, 미선이 사건과 비슷하게 느껴진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적어도 작년 6월의 일이 지금 까마득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환각에 의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장화, 홍련>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닮지 않았나?
제2장 : 변주곡
(스포일러 경고!) <어셔가의 몰락>, <디 아더스>, 그리고 <더 헌팅>까지. 물론 <조용한 가족> 역시 하우스 호러무비였던걸 감안하면 <장화, 홍련>은 거기에서 촬영이나 프로덕션 디자인 등 시각적인 부분에서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고, 스토리나 구성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라는 점 등에서 이 영화를 하우스 심리 호러로 장르구분지을 수 있겠다.
염정아가 새장을 들고다니는 장면에서는 50년대 해머 스튜디오의 영국 공포영화 분위기가 느껴지고, 세트는 일본식 가옥처럼 보이고, 의상은 중국 스타일로 보인다. 가족들이 먹는 식사는 서양식이고, 수연과 수미가 누워있는 장면에서는 퀴어 분위기가 난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잡탕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요소들이 크게 튀지 않고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배경은 시간과 공간을 명확히 알 수 없게 모호하게 처리되었고, 스토리에서도 문화적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큐어>의 정신병원처럼 적막이 흐르는 분위기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너 같은 환자는 많이 다루어보았다는 듯한 말투로 이대연이 수미(임수정)에게 말을 붙인다.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이윽고 말문을 연다. 영화는 수미가 실어증에 걸린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상황으로 인해 수미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즉, 이 영화가 '반전' 효과를 노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미리 짐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이 프롤로그가 꼭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한적한 동네, 외딴 곳에 떨어진 집으로 아버지와 딸이 차를 타고 온다. 차 안에서 수미와 수연(문근영)이 같이 내린다. 고운 햇살에 해맑은 미소를 띤 두 소녀는 손을 붙잡고 시냇가로 간다. 원작동화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그 시냇가.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는다. 다만, 한 컷에서 카메라가 물 속에서 바라본 수연의 발을 비출 뿐이다. 그 컷은 왜 삽입되었을까? 집 안에서만 나타나던 귀신이 미리 소녀를 마중나온 것일까? 아니면, 원작동화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관객을 잠시 놀래키려 한 것일까?
이런 식이다, 이 영화는. 왜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컷들이 군데군데 있다. 그러나 설명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화면이 너무 예쁘고 심도가 아주 깊어서, 그 완벽한 영상미에 반해서 스토리의 지루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분명히 조금만 더 끊어 가고, 불필요한 설명을 생략하면 감독의 의도가 더 잘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에 상황을 설정한다. 그리고 배경을 펼쳐놓는다. 큰 파도를 만들기 위해 작은 파도 몇개가 첩첩히 포개지는 식이다. 귀신은 의외로 새벽에 처음 나타난다. <링>에서 이미 유명해진 팔다리 늘어지는 긴머리 여자가 침대 위로 올라와 다리 사이로 피를 흘리고 그 아래로 손이 쑥 내려온다. 여성의 생리를 암시하는 이 장면 뒤에 수연의 첫 생리 흔적이 침대 위에 묻어 있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 귀신은 인간과 아주 밀접한 위치에 나타나고 인간에게 직접 경고한다. 그래서 그가 주인공들과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귀신들에게서 어떤 '원한'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귀신놀이하려고 나온게 아니라면 그들이 왜 나오는지 관객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하지만, 관객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저 쾅 닫히는 문에도 놀라기만 해야하니 답답할 뿐이다. 아마도 이것은 전반부에 두 자매의 친엄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설명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인데, 이것은 조금 무리였다고 본다. 김지운 감독은 반전 한 방을 통해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는 자세가 얼마나 불친절한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주었다.
몇 번의 귀신놀이에서 사운드 때문에 깜짝 놀라고 나면 이윽고 영화는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는 반전 장면에 다다른다. 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던 진실이 하나둘 밝혀지면 영화는 갑자기 힘을 잃는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 그러니까 왜 부엌에서 귀신이 나타나는지, 간질병을 앓는 여자와 남자는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염정아를 멀리하는지, 김갑수가 놓고 가는 알약은 누가 먹는 약인지, 염정아는 도대체 무슨 증세가 있는 것인지 등등의 궁금증이 한방에 해결됨으로서 관객은 허탈감에 빠진다. 즉, 모든 것이 수미의 정신착란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은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영화를 너무 맥없이 끝내버리는 설정인 것이다. 이렇게 대충 끝내기에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아주 정성들여 찍은 장면들이 많았기에 허탈함은 더 크다. <식스 센스>처럼 전개 내내 아귀가 맞지 않는 딱 한가지가 마지막 한 방을 통해 해결되는, 그런 반전이 아쉽다.
<장화, 홍련>은 김지운 감독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난 김지운이 호러보다는 <반칙왕> 같은 썰렁한 코미디에 더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메모리즈>에 이어 계속해서 공포영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에게 <장화, 홍련>은 완성도가 최고조에 이른 영화다. 하지만, 그 완성도는 사실 프로덕션 디자인과 촬영에 70% 이상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전동화의 현대적 각색이라는 의미에서 이 영화는 아버지에게 아무런 역할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빛을 바랬고,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라는 측면에서도 어떤 새로운 귀신상을 '발명'해내지 못함으로써 진부해졌고, 반전 영화라는 측면에서도 반전이 너무 기능적으로 등장해 스토리를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장화, 홍련>은 너무 무거운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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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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