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itation of Life

자발적 실업자 영화


글: 양유창
2002년 10월 27일

해마다 수십만명의 대졸자가 발생한다. 아마 대학원 졸업자와 고등학교 졸업자 등 취업희망자수를 집계해보면 근 백만명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경제가 다시 불황기로 접어들었다고 하고 그 때문인지 혹은 그것을 위해서인지,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다. 그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청년실업률인데, 이는 수요 대비 공급의 실업률 뿐만 아니라 원하는 직장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발적 실업률이 꽤 높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간에 일하지 않거나 혹은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현실은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혹시 '뜻한 바' 있어 일하지 않고 있다면 몰라도.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뜻한 바 있어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실업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데,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라고 주장하며 큰 기회를 노린다. 여기서 말하는 큰 기회란 속칭 '고시' 따위의 것들인데, 한 방에 신분상승(?), 즉 돈 많이 벌고 사회에서 대접받는 직위를 획득하기 위한 공식적인 능력검증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말한다. 언론들은 취업철이 되거나 경제한파가 닥칠 때면 어김없이 신림동 고시촌이나 대학 도서관을 취재하여 비슷한 보도를 하곤 하는데, 그만큼 이러한 경향은 거의 고정화되어 있다고 하겠다.

몇몇 고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취업의 당락을 가르는 것은 '면접'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시사에 관한 것 등 뻔한 질문들을 면접관이 내던지면,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대답해주면 되는 요식절차가 바로 이 면접인데,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이것은 일종의 '담력테스트'처럼 변한다. 자세히 들어보면 하는 얘기는 다들 오십보 백보지만 얼만큼 떨지 않고 좋은 말을 잘하느냐에 당락이 갈린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네임밸류를 가진 사업체에 지원한 비슷한 학력의 사람들을 지켜보노라면 왜 이런 요식행위가 필요한 지 가끔은 의문이 든다. 그냥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을 성적순서대로 주욱 늘어놓고 1등부터 20등까지는 A기업, 21등부터 30등까지는 B기업하는 식으로 분배하는 것과 '자유민주'적으로 보이는 지금의 방식이 뭐가 크게 다르다고. 좌우지간 남들과 비슷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 스트레스받고 불안해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선,후배를 가를 '기수'나 획일화를 촉진시키는 단체 술문화 등이 가능한 것은 입사하기 전부터 엇비슷한 사람들이 한 곳에서 '동기'가 되어 뭉치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엇비슷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첫째 연령제한으로 나이대가 비슷하기 때문이고, 둘째 군대를 갔다왔기 때문이며, 셋째 비슷한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좁은 공간에서 자라왔고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으며 같은 역사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서로에게 끈 묶는 것 만큼이나 수적으로 열세인 여자들도 여성이라는 이유 자체에서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 여성끼리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마 이러한 무분별한 공통분모 설정작업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공통점이 많다면, 그들은 다른 그룹에 배타적이 될 수도 있겠고, 그룹의 다른 어떤 구성원들과도 수평비교되기에 이를 것이니 급기야 이내 지쳐버려 '독창성'을 침대에 묻고 침묵의 나선으로 숨어버릴 지도 모른다.

내가 왜 실업 이야기를 들먹이는고 하니,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들에 실업자들이 꽤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로드무비>의 정찬(A)은 주식 폭락으로 노숙자 신세가 되고, 순정영화 <연애소설>의 손예진과 이은주(A)는 '그냥 집에 있으며,' 차태현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이제 막 취직을 준비중이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김태우는 겨우 취직을 해서 직장에 충성해야 하는 몸이며, <가문의 영광>의 장정종 집안의 남자들은 정준호를 포함해서 엄밀히 따져보면 모두 자영업자들로 혼자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중독>의 이얼(A)과 이병헌 역시 한 명은 예술가, 또 한명은 카레이서로 정규직과는 거리가 먼 자발적 실업자들이다. <뽀삐>의 백현진은 영화감독을 꿈꾸는 백수이고, <오아시스>의 설경구와 문소리는 마땅히 하는 일이 없다. 오직 <도둑맞곤 못살아>의 소지섭만이 프로그래머와 프리랜서 도둑으로 '투잡스족'을 연기하고 있고 그런대로 박상면이 공무원으로써 확실한 밥그릇을 지켜내고 있지만, 영화처럼 대결했다가는 둘다 직장에서 쫓겨나기 쉽상이다. <YMCA 야구단>의 송강호를 비롯한 야구선수들은 생계에 필요한 돈을 불규칙적으로 벌고 있으며, <유아독존>의 얼치기 3형제에게는 허름한 무술도장이 전부다.

왜 최근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들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것일까? 최근 개봉한 영화들은 보통 6개월-1년 전에 기획된 작품들이고, 당시 한국 경제는 기대에 충만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어떤 작가는 자발적 실업자(<중독>, <연애소설>)에 관한 시나리오를 썼고, 어떤 이는 비자발적 실업자(<로드무비>, <뽀삐>)에 관한 시나리오를 썼다. 특이한 것은 어느 누구도 가장 일반적인 '정규직 노동자'에 관한 글을 실감나게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의 <봄날은 간다>, <고양이를 부탁해>, <와니와 준하> 등을 떠올려보면 그 차이는 드러날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현실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진다고 볼 때, 지금처럼 정말 실업률이 높아질 것을 영화가 미리 예견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영화 속에 실업자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동안 빈부격차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며칠 전 상위 10%와 하위 10%의 빈부 차이가 IMF 전에 비해 10배 더 증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빈부차이가 심해지면 경제적 약자들은 한 방에 신분상승할 기회를 찾게 되고, 이를 위해 일시적으로 자발적 실업자가 된다. 실업자, 그중에서도 자발적 실업자가 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서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아시스>, 'YMCA 야구단'과 <중독>의 흥행성공의 비밀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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