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itation of Life <빵과 장미> 영화가 말을 한다 글: 양유창 2002년 05월 09일 나에게는 영화를 보는 일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특별한 행사 같은 것이 아니라 마치 예전에 알던 친구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러 가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새로 친구를 알게 되는 과정 같기도 하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으며 사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친구를 오래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신인감독의 영화는 쉽게 판단 내리기 곤란할 때가 많다. 반면 오래 전부터 알던 감독의 경우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부터 기대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저 친구는 이번에도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찍었겠지 하는 기대감, 그리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작품들을 접할 때마다 마치 내가 만든 영화인 것처럼 흐뭇해진다. 켄 로치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이었다. 당시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를 볼 수는 없었지만, 흔히 말하는 운동권(?) 감독으로 문제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깐느영화제 출품작이었던 <레이닝 스톤>이라는 영화를 통해 드디어 켄 로치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사실 켄 로치 영화는 깐느와 인연이 많은 편이고, 깐느 역시 계속해서 켄 로치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심사위원상을 제외하고 그다지 상복이 없는 편인데, 아마도 올해 출품된 <달콤한 16세>의 평가가 좋다면 감독상을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전까지 켄 로치의 영화 중 국내에 개봉한 유일한 영화는 <랜드 앤 프리덤>일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이 영화는 중간의 토론 장면으로 더 유명하다. 반면 비디오로 출시된 <하층민>, <히든 어젠다>,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등은 조금 더 과격하면서 의외로 통쾌한 영화들이다. 비록 내가 <하층민>의 대사를 다 알아들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분노가 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켄 로치는 <칼라 송>과 <내 이름은 조>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영화 한 편에 대한 기억보다는 전작과 이어지는 분위기, 주인공의 모습 정도만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영화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켄 로치는 계속해서 같은 주제로 영화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을 꾸준하게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익숙한 방식에 오히려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됨으로써 긴장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영화의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만약 이것이 작가영화의 한계가 아니라면 작가영화를 대하는 나같은 관객의 한계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미학적 시도들 때문에 켄 로치를 비판할 수는 없다. 상업화된 영화계에서 꾸준하게 자기 방식대로 철저히 소외된 계층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켄 로치의 장인정신은 경이적이고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과연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가 기꺼이 커피 심부름이라도 해주겠다고 말했을 만큼 켄 로치는 많은 현직 감독 및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감독 중 한 명이다. ![]() 아마도 <빵과 장미>는 켄 로치 영화들 중 가장 코믹하고, 쉽고 재미있는 영화일 것이다. 더군다나 L.A를 배경으로 차별받는 소수인종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우리의 반미감정과도 정서가 통한다. 잘만 포장하면 <집으로...>처럼 의외의 흥행성공을 거둘 수도 있는 아이템이다. 문제는 그럴 만한 배급력이 없다는 것이지만, 씨네큐브에서 단관 개봉할 <빵과 장미>가 <타인의 취향> 만큼이나 흥행에 성공해서 더 많은 켄 로치 영화들이 개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날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영화가 세상을 움직이는 도구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 곁에 존재한다. 일관성 있게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대항하는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대개 그런 사람들이 영화적 성공을 거둔 이후에는 기존 시스템으로 흡수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거의 절대적으로) 켄 로치 만큼 유명한 사람이 켄 로치 같은 스타일로 켄 로치 같은 영화를 계속해서 찍지는 않는다. 오직 한 사람, 켄 로치 만이 그 일을 할 뿐이다. 그는 매년 작품을 발표하는 다작 감독이다. 그의 영화들에는 그가 늘 비판하는 세계화시대의 다국적 기업들과 방송사들도 돈을 댄다. 그 돈을 가지고 그는 자본주의 이면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보수적인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빵과 장미>에서 청소부인 마야가 선동가인 샘에게 묻는다. "우리는 이 일에 인생을 걸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뭘 걸고 있죠?" 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시위를 통해 노조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지식인 켄 로치의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영화가 말을 할 뿐이다.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