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의 02년
글: 양유창
2002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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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상영관 '모악홀' ⓒRayfilm |
하지만, 서로 감싸주는 사랑을 다루기에 이 영화는 조금 길었다. 몇 분만 잘라내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준다.
특별전이나 회고전을 제외하고 올해 전주에서 눈에 띄는 작품들은 홍콩과 중국의 영화들이다. 특히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를 다룬 영화들이 꽤 있었다. 에반스 찬 감독의 <섹스와 사랑의 지도>는 그중 하나다. 제목의 선정성과 전혀 상관 없이 아주 감성적인 화면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디지털 영화는 개인적인 치부와 홍콩의 역사를 결합시킴으로써 영화 속에서 시대성과 서정성을 동시에 찾고자하는 관객을 만족시킨다. 마카우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실은 나찌의 황금으로 연명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갖고 있는 뉴욕 기반의 다큐멘터리 감독, 어릴적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선생에게 고백했다가 엉뚱한 충고에 충격을 받은 한 댄서, 그리고 동유럽 중 벨그라드를 여행하다가 내전의 포화 속에서 인생의 자포자기에 빠져버린 한 여자. 이들은 마치 <줄 앤 짐> 같은 관계가 되어 서로의 고민을 들어준다.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은 두 남자 중 한 명이 아닌, 그 사이의 여자라는 것.
올해 전주영화제의 리더필름은 이성강 감독이 만들었고 아주 인상적이었다. 영화 시작 전 어김없이 상영되는 이 짧은 애니메이션은 전주비빔밥과 불교의 만다라를 섞어놓은 듯한 간결하면서도 화려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데, 어떤 극장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사실 전주는 다른 영화제와 그다지 차별화된 영화제는 아니다. '대안영화'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진보'라고 선언하는 것 만큼이나 아주 모호한 단어일 뿐이다. 영화제 원년에 불었던 디지털 영화의 바람도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고, 호기심을 끄는 새로운 시도 역시 별로 없었다. 올해의 테마인 '전쟁'도 그다지 주목받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특별히 언급할 만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영화제에서 관심은 오히려 기존에 '새로웠다'라고 평가받는 작품들의 회고전에 더 집중되었다. 울리히 사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크리스틴 버천 등의 작품들이 섹션별로 마련되어 환영받은 것이 그런 예이다.
비록 차별화된 영화제의 주제, 주제에 맞는 프로그래밍에서 한계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래도 올해 영화제의 성과라면 보다 지역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점일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섹션, JIFF 패밀리 카드제 도입, 옛날 한국영화 상영 등은 현지인을 배려한 흔적이 남아 있는 부분이다.
반복되는 영사사고, 스케줄의 잦은 취소 등 전주영화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이번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함은 무엇보다 돋보였다. 셔틀버스, 극장 입구, 매표소 등에서 노란색 옷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은 관객에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짧은 기간의 여정이라 많은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올 7월에 개봉할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언제라도 항상 매진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과 올해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이라는 타이틀이 합쳐져 이 작품이 상영된 이틀 동안 그 큰 두 극장이 관객들로 가득 찼다.
개봉에 즈음해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지금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단연 최고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별로 이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죽음 이후 다시 연출에 손을 댄 하야오가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상상력과 환타지, 화려함과 단순함, 동양적인 신비, 아이들을 위한 권선징악 속에 철학적인 내용까지 많은 것이 담겨 있으면서도 보는 내내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과연 이런 영화는 그 규모 면에서도 놀랍지만, 그런 규모를 등에 업고 드라마를 적절히 끊어가는 타이밍에서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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