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르담 영화제에서의 하루
글: 양유창
2002년 0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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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인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가량 걸려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플랫폼에서 10분 간격으로 도착하는 다양한 노선의 열차시간표를 보며 유럽에서의 기차여행의 편리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이곳 로테르담은 암스테르담과는 달리 좀더 현대적이며, 활기찬 도시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젊은이들을 이곳에서는 거리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Testing the limits - showing film in all its aspects' 로테르담 영화제의 정신을 말해주는 이 글귀와 함께 제31회 로테르담 영화제가 23일 개막하였다. 유럽의 아시아영화 창구로 불리우는 영화제답게 이번 영화제의 라인업에서 역시 아시아영화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십수편의 일본영화와 함께 한국영화도 수 편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타이거 경쟁부문에는 <봄날은 간다>와 <고양이를 부탁해>가 올라 있다.
"로테르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화제 코디네이터가 악수를 청하며 말을 건넨다. 영화제 메인건물인 'De Doelen' 빌딩은 영화제 관계자들과 각지에서 온 게스트들로 붐비는 곳이다. 문밖의 끔찍한 날씨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아주 친절하다. 이곳이 로테르담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그 옆에 위치한 'Pathe'는 멀티플렉스로 영화제 전용 상영관이다. 이곳에서는 영화를 보러 온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영화제가 20대 위주의 관객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곳 관객들은 대개 20대 후반에서 30대, 그리고 40대와 50대도 보인다. 그들은 'Pathe' 2층의 로비에서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일본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신작을 보러 온 한 백발의 백인 노신사가 홀로 영화제를 찾아 영화를 보기 위해 안경을 꺼내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다.
Exploding Cinema
영화란 무엇일까? 로테르담은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는 영화제처럼 보인다. 페스티벌 디렉터인 사이먼 필드는 이에 대해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히 답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한 해답을 찾기 위한 새로운 노력들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What is Cinema?', 'Exploding Cinema', 'Desert of the Real', 'Looking Glass', 'Dutch Perspective', 'Critics' Choice', 그리고 Goran Markovic, Zacharias Kunuk와 Stan Brakhage 회고전으로 구분된 사이드바들은 영화제에 초청된 6백여편의 영화들을 분류 정리해놓고 있다.
나는 로테르담에 도착하기 전에 네덜란드의 영화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폴 버호벤을 제외하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Dutch Perspective에 등장하는 이름들 역시 낯설기만 하다. 또, 이곳에서 역시 네덜란드의 영화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이 영화제는 유럽보다는 아시아를 더 지향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깐느와 베를린, 베니스가 각각 자국 영화의 황금기를 배경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면, 거장을 배출한 적 없는 네덜란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다른 대륙으로 눈을 돌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31회를 맞은 올해까지 로테르담은 많은 아시아 영화들에게 황금호랑이상을 시상해왔다. 그리고, 올해의 심사위원장은 역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감독 후 샤오시엔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올해 로테르담이 한국영화를 2편이나 경쟁부문으로 초청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약간은 질이 떨어지는 한국 단편들이 초청된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영화제 첫 날, 한국단편들을 4편 보았는데, 이중 <오르골>과 <개집이 있던 자리> 2편은 도대체 프로그래머의 선정기준을 알 수 없는 우울한 영화들이었다.
The Desert of the Real
이 사이드바의 제목은 9.11테러를 당한 미국을 보고 영화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매트릭스>의 가상의 공간으로부터 깨어난 키아누 리브스가 마주치는 현실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에 둘러싸인 사막처럼 황량하다.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이 변화할 수 있다.
어제 개막식에 이은 영화제 둘째날, 경쟁부문에 오른 영화 자노 로스비아니의 <지얀(Jiyan)>과 메인단편 부문의 가와세 나오미의 <캬카라바아(Kya ka ra ba a)>를 보았다. 지도상의 위치도 알지 못했던 쿠르디스탄에서 쿠르디쉬로 만들어진 <지얀>은 그러나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아마도 이란과 이라크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 나라는 1998년 이라크에 의한 화학폭탄 사고로 인해 5000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에 대해 침묵했고, 쿠르디스탄의 피해는 알려지지 못했다. 5년 후 한 쿠르디쉬계 미국인이 자신의 고향인 쿠르디스탄으로 와서 '지얀'이라는 이름의 한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고아원을 지어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 마을의 사람들에 대해 잘 알게 되고, 순박한 이들과 곧 친해진다. 말없이 수줍어하는 지얀은 폭탄 사고로 인해 얼굴에 상처를 입었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살아남은 고아이다. 지얀이 말을 하기 시작하고, 웃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쿠르디스탄에 대해 따뜻한 인상을 남긴다. "우리는 5000여년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우리 적들과 싸울 것입니다." 새로 건축된 고아원의 테이프를 끊으며, 마을의 시장이 주민들에게 외친 말이다.
로스비아니가 우회적으로 가려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려 했다면, 가와세 나오미의 단편은 철저히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4년 전 <수자쿠>로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하면서 최연소, 아시아 최초 수상자가 된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진짜 모습인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한 번도 같이 산 적 없는 아버지를 버리고,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등에 문신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문신을 새겨넣은 그녀의 뒷모습을 뒤쫓는다. 그녀는 바닷가로 내달린다.
영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2편의 한국단편에서 느꼈던, 삶에 대한 무거운 척하는 의미없음이 그 해답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너무 개인적이라 영화 자체를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가와세 나오미가 문신의 고통을 스스로 참으며,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가는 그 모습에서는 그래도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예술을 찾아가는 어느 한 아마추어 예술가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또,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영화 속에서 구원하려는 중동의 어느 한 소녀의 상처 속의 미소에서는 '인생'이 느껴진다. 그 어느 쪽에서든 나는 새로운 모습의 영화와 예술의 의미를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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