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itation of Life

레퀴엠, 자세, 한국영화, 진보, 조선일보


글: 양유창
2001년 07월 27일

1. 레퀴엠, 자세

요즘 6월달의 '씨네21'을 한권씩 보고 있는데, 내가 이곳에 없었을 때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짜맞추어가는 일이 재미있다. 내가 저기서 저렇게 시간 보내고 있을 때 여기에선 이렇게 시간이 돌아갔구나 하는 생각은 참 신기하다.

특히 요즘 신문을 보면서 옛날 기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또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문열과 추미애 의원의 논쟁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도대체 이문열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럴까. 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조선일보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진 것일까. 정말 요즘에는 조선일보를 공격하는 것만이 선이 된 것 같다.

'너 답지 않구나' 라고?
김지운의 숏컷 컬럼과 정윤수의 이창을 좋아하는데, 김지운 컬럼 중에 '자세'에 관한 얘기가 있다. 한 번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었는데, "너 답지 않구나"라는 얘기를 듣고 좌절하는 이야기. 생각해보면 나도 참 김지운 감독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인 것 같다. 나와 술자리를 같이 해본 사람이나 혹은 나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눈치 챘는지 안챘는지 모르겠으나 나 역시 좀 일반 사람들처럼 놀아보기 위해 무척이나 애써본 사람이다. 특히 학과 동기회에 가면 술자리에서 뻘쭘하게 앉아 있는 것 싫어서 이것저것 '오버'를 해보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옛날의 점잖던 네가 아니야" 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또 좌절한다.

아예 그런 술자리에 안나가면 편한 일이지만, 그렇게 몇 번 모임에 안나가다보면 사람들을 잃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가뜩이나 정기적으로 소속된 곳이 없는 자유의 몸인 마당에 사람들과 하나둘씩 연락이 끊어지기 시작하면 점점 고립되기 시작한다. 다시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그때 뿐이다. 또다시 같은 일의 반복이다.

그래서 난 가끔 나는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걸까 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긴 여행을 통해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건 다르지 않건 그냥 내 나름대로 살면 되겠다는 것이다. 무척 해보고 싶은 것은 해보면 되고, 사람과 멀어지면 아쉽지만 그렇게 이별하는 것이다. 이별과 만남이 반복되고 좋아함과 싫어함이 반복되고 습관과 낯섬이 반복된다. 그 안에 내가 존재하고, 나는 자유롭다.

옥스포드에서 한 영국인에게 돈을 빌려준 일이 있었다. 3명의 어린 아이를 차에 태운 젊은 여자와 남자는 나에게 차 기름 값이 없어 런던에 갈 수 없다며 돈을 조금 빌려달라고 했다. 꼭 값겠으니 믿어달라고. 나는 그녀에게 70파운드를 빌려주었다. 70파운드면 14만원에 해당하는데 런던에서 1주일 숙박을 할 수 있는 돈이다. 당시 자금사정이 좋지 않던 나에게는 큰 돈이었다. 사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여자와 남자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녀에게 내 런던 주소를 적어주었고,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받아적었다. 나는 당시 핸드폰이 있었지만 일부러 전화번호를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나는 당신을 믿으니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방인이지만, 3명의 아이와 함께 있는 당신은 나보다 더 힘들어보인다고 말했다. 70파운드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녀는 떠나갔고 나는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날 옥스포드 대학을 걸으면서 난 한참을 돈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빌려준 70파운드 혹은 내가 고의로 잃어버린 70파운드. 난 돈을 돌려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돈을 잊어버리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걱정과 근심 속에서 차츰 평온을 되찾아가는가 싶으면 다시 잃어버린 70파운드의 엘리자베스 여왕 얼굴이 떠올랐다. 런던으로 돌아와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우편물을 기다렸다.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에도 나는 런던의 우편함을 떠올렸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그 일을 잊을 수 있었다. 꼬박꼬박 알뜰하게 살면서 그렇게 한 번쯤은 돈을 잊을 수 있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래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뭐.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그런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이 더 자유롭고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돈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갔고, 나는 내 나름의 유럽을 만들 수 있었다. 난 더 많은 다양성과 더 많은 관용을 갖게 된 내가 좋다.

2. 한국영화, 진보

정윤수의 이창에서 그는 한국영화가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은 80년대 학번들이 대거 영화계로 진출한 덕분이라고 했는데, 사실 한국영화가 발전하고는 있지만 진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기술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고, 상업영화 제작에 대한 노하우도 쌓여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보인가? 헐리우드가 팽창한다고 해서 아무도 헐리우드가 진보한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80년대 당시에 진보적이었던 브레인들이 한국사회가 열리면서 세계화로 방향을 선회한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여전히 표정이나 모양새는 천편일률 한국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듯 보이기는 하는 거다.

3. 조선일보

요즘 조선일보를 보면 거의 발악을 하는 듯 보인다. 예전에는 그저 누가 뭐라고 하든 씹으면서 당당한 조선일보였는데, 요즘에는 사설과 컬럼을 통해 꼭꼭 항변을 한다. 정권에 비판적인 신문은 조선일보 하나 뿐이라면서 조선일보가 없으면 모두들 정권의 나팔수가 될 것이라고 하니 아마 해외에서 조선일보 기사만 스크랩해서 보는 독자들은 다시 전두환 시절의 한국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정말 해외의 한인사회에서 발간하는 주간지들은 놀라울 정도로 보수적이다) '씨네21'에서 신현준마저 언론개혁이 어쩌구 하는 컬럼을 싣었는데, 솔직히 읽으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요즘 '언론개혁'이라는 단어와 '조선일보'라는 단어만큼 현기증나는 단어도 없다. 그리고 결과가 눈에 보인다. 조선일보가 망나니짓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짓이 재미있어서 읽어주는 나같은 독자도 있다. 조선일보가 논조를 바꾸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다 큰 어른이 어린 아이 말을 듣고 세계관을 바꾸는 것이 장유유서의 한국사회에서 어려운 것처럼 조선일보의 막강 파워라인과 배급라인은 결코 호락하게 태도를 굽히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독자를 줄여서 조선일보를 일종의 컬트신문으로 남기는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조선일보의 유력인사들을 모두 아웃사이더로 만들어야 한다. 한 번도 아웃사이더인 적 없던 그들이 과연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이 빠져나온 인사이더의 자리에는 또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 누가 들어간들 크게 달라지기는 할까?

이 세상의 어느 사회에서도 정치인과 언론인은 대개 욕을 먹는다. 아무리 잘해도 겨우 욕먹는 것을 피하는 것 정도일 뿐이다. 문제는 욕 먹으면 당장 물러날 줄 아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PS)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http://www.rayfilm.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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