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마레에 가고 싶다
글: 양유창
2001년 01월 30일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기침, 가난, 사랑.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커져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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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를 만났지만 그녀는 지금 그가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니었고 여자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추억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바닷가. 그곳에서 짐을 정리하는 남과 여. 지금부터 긴 얘기를 해드릴텐데 들어주실 수 있나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바닷가. 지하철 4호선 중앙역이 멀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일까. 제주도에서 올라온 그녀는 성우가 되고 싶어 한다. 남자는 건축학과 대학원생. 아버지와의 불화로 지금은 공사장에서 노동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 남자의 죽음을 예견한다. 98년에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리고 2000년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 그것은 기침, 가난 그리고 사랑.
일 마레에 가고 싶다. 빨간 우체통을 갖고 싶다. 바람부는 날 빨간 우체통을 열면 편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를 닮은 편지.
기분이 좋아지려면 요리를 한다. 스파게티가 제대로 익었는지 알아보려면 벽에 던져보면 된다. 딱 달라붙으면 그때는 불을 꺼도 된다는 표시. 빨래를 하면 잊고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다. 빨래란 그런 것이다. 살갗과 피복의 표백작용.
지하철 플랫폼에서 만난 그녀는 무언가 노트를 하고 있다. 대본을 읽고 있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구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일 마레에 오신 당신을.
지하철이 레일을 따라 들어오면 그녀는 일어설 것이다. 하나, 둘, 셋. 호흡이 빨라진다. 그 남자는 2년 후의 그녀가 준 귀마개를 하고 있다. 그리고 2년 전의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웃는다.
일 마레는 따뜻한 곳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묻어 있는 곳. 앙상한 나뭇가지로 불이 켜지면 그와 그녀는 행복한 표정이 된다. 바이킹을 혼자타고 낙엽이 깔린 길을 홀로 걷는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곳, 일 마레.
일 마레에 가고 싶다. 지금은 철거되어 버린 곳이지만, 2001년의 나는 1998년의 한성현과 2000년의 김은주가 살았던 그곳이 그립다. 그 사람이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
일 마레에서 행운이 가득하길 빌겠어요.
<시월애>(2000) / 감독: 이현승 / 출연: 이정재, 전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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