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숲> 자기 최면에 빠진 남자
글: 양유창
2004년 0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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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산 거미 한마리가 뉴욕 상공을 날아다니는 와중에 한국에서는 작가주의의 계승자 송일곤 감독이 또다른 거미를 풀어놓았습니다. 이번에는 한마리가 아니라 거미들의 집단 서식처인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존재하는지 불분명한 '거미숲'에서 사람들은 기억을 잃고 자기최면에 빠집니다.
인간에게 있어 거미는 그 외모만큼이나 불길함의 상징처럼 취급되어 왔는데요. 일본에는 "거미를 죽이면 거미가 인간의 영혼을 가져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마치 이 속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거미숲에서 영혼이 사라지는 등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을 벌여놓고 차분하게 파헤쳐 갑니다.
새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방송국 PD인 강민(감우성 분)은 우연히 거미숲이 있는 산장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살해되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남자는 방송국 국장이었고 여자는 결혼을 앞둔 자신의 애인이었죠. 그렇다면 이것은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단순한 치정극일까요?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을 기대하도록 만듭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신비롭고 또 차분하게 강민이 지난 며칠 동안 겪었던 일들을 추적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의문을 갖고 추적해가면 갈수록 마지막에 남는 것은 '거미숲'입니다. 나무들에 둘러싸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깊은 숲속에서 거미들만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듯 불안한 침묵이 영혼을 잠식하는 그곳. 도대체 거미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거미숲에 귀신이 나온다고 방송국에 제보한 민수인(서정 분)이라는 여자는 취재를 위해 찾아온 강민을 거미숲으로 안내합니다. 신비롭게 보이는 이 여자는 강민의 전 부인과 많이 닮았습니다.(서정의 1인 2역) 민수인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강민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데요, 마치 진실에 목말라하는 오이디푸스를 좌절시키게 만들었던 이오카스테(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처럼 강민을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의 늪으로 떨어뜨립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로 유명한 에셔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에셔의 성에서는 어느 쪽으로 걸어도 결국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죠. 또 흰색과 검정색을 대비시켜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그림이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강민이 목격한 살인사건은 그 사건을 보는 시점에 알고 있던 정보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이 됩니다. 흰색만을 알고 있을 때는 강민의 선한 표정만 보였다가 검정색이 보이기 시작하면 강민 또한 그 사건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양 극단의 상황을 동시에 놓고 진행되면서 어느쪽으로 가더라도 결국 한 가지 귀결로 도달하는데요. 그곳은 바로 처음부터 강민이 서 있던 지점입니다. 에셔의 빠져나올 수 없는 성에서 시간은 엉겊의 태엽을 감아 돌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강민 역시 순환하는 시간의 틀 속에 갇혀버린 것이지요.
비슷한 방식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시간 속의 감춰진 진실을 다룬 데이빗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나 테리 길리엄의 <12 몽키즈>, 알렉스 프로야스의 <다크 시티> 등의 영화에 익숙하시다면 이 영화에 매혹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진중함'과 '예측할 수 없는 내러티브'가 장점입니다. 송일곤 감독의 이전까지 영화, 즉 <꽃섬>이나 <소풍>, <간과 감자> 등이 단순한 이야기를 화면의 아름다움과 심각한 성실함으로 승화시켜냈다면 이번에는 유려한 미장센을 바탕으로한 '스토리' 그 자체로 승부하고 있습니다.
좋은 영화에 나쁜 배우 없는 법이듯, 감우성의 감성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광기어린 연기는 영화를 지배합니다. 서정은 딱딱한 문어체의 말투가 아쉽습니다만, <섬>에서의 신비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영화를 긴장감 있게 이끕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적확한 배역은 <비디오를 보는 남자>의 장현성입니다. 그는 강민의 친구이자 형사 역할을 무리없이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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