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인의 추억> 멋진 미스테리 스릴러 :::
dreamalive | 2003년 05월 22일
조회 3325
텍스트 내적 완결성
영화는 미스테리, 스릴러, 서스펜스, 서프라이즈, 공포, 코미디 등 다양한 요소들을 버무려가며 2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끄럽게 흐름을 잘 이어간다. 시나리오의 완결성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살인사건 현장에서부터 시작한 영화는 수사의 진행 상황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충분히 정보를 전달하고 있고, 그러면서 지루하지 않게 중간중간에 또 계속해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용의자가 진범일까 아닐까 하는 궁금증, 다음 피해자는 누가 될까 하는 궁금증도 불러일으키고 있고, 간간히 살인하는 장면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면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긴장감으로 더욱더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코 범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미스테리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점, 마지막 장면에서 서늘한 여운을 남기는 점도 뛰어나다.
이런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나는 우리 나라 영화 중에서 아직까지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가 이렇게 높은 완성도를 가진 예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장윤현 감독의 <텔미썸딩>이 가장 완성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이것 말고는 거의 언급할 만한 영화도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나 <인썸니아> 같은 영화를 보다보면, 왜 우리 나라에는 이렇게 멋진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가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텍스트 외적으로 열려 있음
이 영화는 또한 텍스트 내적 완결성은 물론 텍스트 외적으로도 열려있어서 영화의 의미를 보다 풍성하게 하고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이 87년이면 6월 항쟁도 있고 어쨌거나 데모가 한창일 때인데, 그런 어수선한 시대적 분위기가 영화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확실히 보여주듯이 그 키워드는 '산만함', '어수선함', '어설픔' 등이었다.
밝은 대낮에 논뚜렁에 횡하게 버려져 있는 시체, 현장 보존이 안돼서 주민들이 마구 들어오고 아이들이 시체 앞에서 뛰어놀고 있고, 경운기가 발자국을 밟고 지나간다. 전경들이 전부 다 데모 진압하러 가서 범인을 놓친 일, 우리 나라에 유전자 감식 기술이 없어서 미국까지 보내 그 결과만 기다리는 것, 술집에서 뉴스보다가 대학생이랑 형사랑 싸우는 것, 못에 찔려 놓고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파상풍에 걸려 다리를 잘라내야 했던 것 등등 수많은 소품들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었다.
이런 세세한 것들이 생생하게 잘 살아 있었기에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에서 그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요즘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는 복고풍 코드를 접목시킨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부터가 '추억'이지 않은가. 그 추억의 시선은 매우 애정이 담겨있다. 촌스러운 옷과 '나이스' 운동화 같은 것에도, 무식하고 투박한 송강호와 그의 동료 형사에게도,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변태 같은 사람에게도,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한 박해일에게도 감독은 다 따뜻한 애정어린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진범을 바라보는 시선도.
사실 고문하는 형사가 얼마나 나쁜 놈인가.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다. 송강호가 동료 형사 다리 자르는 수술 서명하면서 '시발놈'이라고 하는 대사, 또 김상경에게 얻어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는 박해일을 붙잡고 그의 얼굴을 보면서 '너 밥은 먹고 사냐' 라고 하는 대사는 감독의 그 시대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텍스트 외적으로 볼 때 이 두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히치콕이 아닌 스필버그
그래서 영화는 미스테리 스릴러에 복고풍 시대 분위기를 얹는 형식을 취한다. 아무리 시대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하여도 그것은 결국 괜찮은 소스에 불과하지 결코 주요리가 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를 떠올리게 한다. 미스테리 스릴러를 통해서 감독은 결국 무엇을 하려고 했나. 관객의 심장을 쿵쿵거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나. 물론 스릴러에서 이것은 기본이긴 하지만 히치콕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스릴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의 욕망이나 심리에 관해 깊이 천착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영화 <싸이코>나 <현기증>, <새> 같은 것만 보더라도 영화가 물론 스릴있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고민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살인의 추억'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범인이 아닌 형사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심리에 대한 깊은 고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스릴은 어떤 함의도 담고 있지 못하고 그저 관객에게 익숙한 감정의 코드로만 영화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히치콕의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만든 스필버그에 가깝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시선을 그저 양념으로 쓰면서 현란한 액션과 또 주인공에 대한 서스펜스를 보여준다. 디스토피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발언을 하고자 한게 아니라 그저 독특한 소재로만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매트릭스>의 경우에도 그럴 것이다. 현실과 가상이 혼합된다는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를 그저 소재거리로 차용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인의 추억'은 우리 사회에서 꽤나 흥미로운 코드인 80년대 시대 분위기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스필버그가 어디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의 완결성 면에서 흠잡을 데 없이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아직까지 한국의 히치콕은 나오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스필버그라도 나온다면 그게 어딘가. 사실 이처럼 대중적이고 상업적으로 완성도 있게 영화를 잘 만드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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