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잔혹물의 붐을 맞아 - 영화 <가위> 안에서 :::
김제현 | 2000년 10월 10일
조회 1266
다만 <가위>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주위를 맴도는 경아의 원혼이 있다라는 사실에서 주는 긴장감이다. 물론 그러한 긴장감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가위>는 나름대로 그러한 긴장감을 잘 표현하였다.
 | | 한국 공포영화의 어떤 경향 <가위> |
<여고괴담>의 성공을 보았을 때, 언젠가는 한국에도 공포영화가 나름대로 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예상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빨리 찾아왔다. 이제는 제작사들에게 '공포' 장르는 더 이상 천대받는 장르가 아닌 흥행을 보증하는 귀한 장르가 되어 버렸나보다. 올 여름 개봉된 4편의 공포영화는 앞으로 한국의 공포영화가 어떻게 흘러가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4편의 공포영화를 통해서 본, 한국 공포영화의 미래는 썩 밝지만은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위>는 전통적인 한국 공포영화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왜냐하면 공포 영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공포스러워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위>는 다른 세 편의 작품과는 다르게 이 부분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최소한의 흔적은 엿 보이기 때문이다. 피 튀기고 죽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공포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사람 죽는 장면이야 '람보' 류의 영화가 훨씬 많이 나오는데 그렇다고 누가 <람보>를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라고 말하겠는가.
<가위>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만드는데 많은 신경을 쓴 작품이다. 그렇기에 사운드가 별로 좋지 않은 곳에서 <가위>를 보면 그 재미는 반으로 '팍' 줄어 버릴 수 있다. <가위>는 스크린 화면에서 보여주는 눈으로 보이는 공포만큼이나 소리로 전해지는 오싹함에 많은 신경을 쓴 작품이다. 그래서 엉성한 사운드가 달린 극장에서 <가위>를 본다면 후회하기에 딱 좋은 영화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요즘 극장들은 최근 몇 년 안에 새로 생기거나 새로 고친 극장들이 많아서 사운드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가위>의 사운드가 다른 영화보다 중요한 이유는 <가위>는 관객들을 공포 스런 장면으로 몰고가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쓴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위>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경아(하지원)라는 사실을 관객들이 초반부터 알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요소 모두를 동시에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볼 때,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을 것이다.
<가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4편의 한국 공포영화 중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이다. 코믹 공포라는 특이한 장르를 선택한 라호범 감독의 데뷔작 <하피>, 전형적인 허리우드식 공포영화 "시나리오는 상관없다. 잔인하게만 만들어보자" 식의 <해변으로 가다>, 한국영화 최초로 스너프 필름을 소재로 다룬 <찍히면 죽는다> 그리고 <가위>. 각각이 나름대로 흥미로운 요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위>가 단연 독주를 한 이유는 <가위>가 한국인의 보편적인 공포 적 정서를 잘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위>의 등장인물들의 인기도와 비례한 것이라는 측면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원래 영화라는 장르가 스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바닥이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위>의 스타 시스템은 작품의 흥행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로 작품의 질은 떨어뜨리지 않았나 보여진다.
보편적으로 다른 공포영화에서는 관객들이 '살인마의 정체'에 많은 신경을 쓰게끔 이야기를 끌고 간다면 <가위>는 관객들이 살인마의 존재이유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게끔 이야기 구조를 만들었다. <가위>는 처음 시작 장면에서 시체실에서 눈을 뜨고 죽은 경아(하지원)를 보여준다. 시체실을 지키는 아저씨가 그녀의 눈을 감기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은 그녀의 눈을 꿰맨다. 그렇지만 관객들이 뻔히 짐작할 수 있는 대로 그녀의 눈은 다시 번쩍 뜨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니까 <가위>는 처음부터 앞으로 시작될 '살인'의 주체는 경아 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영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인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서비스로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식스 센스>가 브루스 윌리스는 유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영화를 시작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가위>에서 관객에게 주는 흥미의 코드는 바로 경아가 "왜 살인을 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위>는 공포영화로는 예외적으로 등장인물에 의한 반전이 아닌 이야기 구조의 반전을 시도한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가위>의 이야기 구조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도는 좋았지만 실패했다. <가위>를 보는 관객들 중에서 바보가 아닌이상 "경아가 왜 죽었는지" 그리고 "왜 살인을 하는지" 는 너무나 뻔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뭐 그게 안 들여다보인다면 할 말이 없다. 다만 그런 이해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다음부터는 때려부수는 장면으로 떡칠 한 허리우드 영화나 보기를 바랄 뿐이다.
<가위>에서 경아가 어떤 아이였는지를 알아 가는 과정의 중심에는 혜진(김규리)이와 선애(최정윤)가 상당히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의 중간중간 경아의 과거 어릴 적 모습들이 나타나는 장면은 대부분이 혜진이의 회상 장면이고 '어퓨 굿 맨' 모임에 새로 들어온 은주라는 신비스런 인물이 경아라고 밝히는 사람은 바로 선애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코드로 의도했던 "경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에 대한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은 바로 혜진이가 우연히 손에 넣게 된 비디오 테이프를 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들 세 명의 관계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혜진, 경아, 선애 이들 세 명의 관계에서 엮어지는 갈등들은 동성애, 이성애, 질투, 공포, 원망 등 아주 복합적이고 영화를 이끌어 가는 키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들의 연기는 전혀 복합적이지 않다.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김규리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린 짜증 섞인 표정연기는 <여고괴담>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달라진 것이 없고 최정윤과 하지원은 신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오버연기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가위>는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스타들로 구성된 시스템의 한계를 결국 벗어나지 못한 영화이다.
다만 <가위>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주위를 맴도는 경아의 원혼이 있다라는 사실에서 주는 긴장감이다. 물론 그러한 긴장감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가위>는 나름대로 그러한 긴장감을 잘 표현하였다. 39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의 음악팀이 만들어 낸 사운드의 힘이 크다. 가끔 가위에 눌리게 되면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 한 곳만을 쳐다 볼 때가 종종 있었다. 그 때마다 귓가에서 어떤 여자가 내 귀에 무엇인가를 속삭인 적이 있는데 그 때의 공포는 말도 표현 할 수 없다. 영화 <가위>는 영화적 문법으로 그러한 가위 눌릴 때의 공포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영화이다. 좀 더 탄탄한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그러한 소재를 엮었다면 참 괜찮은 공포영화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텐데,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하긴 정지영 감독 밑에서 수업한 안병기 감독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겠지.
<가위>를 비롯한 올 여름 개봉한 공포영화를 보면서 앞으로 한국 공포영화가 기존의 공포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갖가지 코드들을 한 데 모아서 풀어 헤치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릴 것같아서 무척 걱정이 된다. 스크림 이후 더 이상의 포스트공포영화는 나올 수 없나보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포스트를 떼어버리고 공포에만 신경썼으면 좋겠다. 어설프게 모아놓은 코드들을 풀어 헤쳐 놓고는 포스트 붙여 달라고 떼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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