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친구> 나의 아름다운 친구들 :::
양유창 | 1997년 04월 01일
조회 2940
세 친구 Three Friends (1997)
- 나의 아름다운 친구들 (My Beautiful Friends)
감독: 임순례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선생님의 차를 부수어 버리는 학생들과 자신의 군대 얘기로 시간을 떼우고 계시는 선생님(아마도 교련 과목이 아닐까)에게 눈을 부릅뜬다(한 마디로 갈군다)는 이유 만으로 이단옆차기로 구타당하는 '무소속'을 보면서 난 이 영화에 반해버렸다. 지금까지 한국영화 속에서 이처럼 사실적인 장면을 본 적이 없다. 솔직히 일 년에 한두 편의 영화만 보는 일 반 관객들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을 만한 이 영화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많을 리 없겠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러한 평범함 속에서도 독특함과 신 선함을 맛볼 수 있는 영화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쉽게 다가오게 하면서도 또한 쉽게 잊혀질 수 있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은 우리의 영화 만들기가 이제 우리네 삶과 밀접하게 닿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1. 나의 세 친구들 : 캐릭터의 문제
고등학교 동창이자 어릴적부터 친한 사이로 보이는 세 친구(각각 무소속, 삼겹, 섬세라는 애칭으로 불리는)가 졸업식장에서 만나면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졸업식장에서 그들을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 영화 속에서 세 명의 인물이 처하게 될 상황과 그들의 환경을 예고한다. 서울 변두리 산동네의 구석구석은 그들에게 너무 좁은 곳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마저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자포자기하기 시작한다.
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취직도 하지 못한 채 무작정 사회로 내버려진 고교 졸업생들에게 남겨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무소속은 특기인 만화에 열중하고, 섬세는 미용에 재능을 보이며, 삼겹은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셋 중 가장 원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데, 원인은 가정 환경과 사회이다. 무소속이 공모한 만화는 저작권을 침해당하고, 섬세는 가정 내의 구조적인 문제로 미용사 자격을 얻는 데 실패하며, 삼겹에게는 단지 몸무게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공평한 시선이 너무 따갑다. 그들은 노력하지만, 사회 구조 속에서 모두 패배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때로는 잔혹하기까지 하다.
그들 주변의 인물들도 그들의 사회적인 타락을 부지불식간에 뒷받침한다. 세 친구들의 부모들은 각각 알콜 중독자, 바둑광, 그리고 집안 대대로 육중한 몸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집안 출신이며, 여기에 동네의 아이들 마저도 부탄가스를 흡입하고 깡패짓을 일삼는 불량 소년, 소녀들이다. 세 친구들이 미성년자 딱지를 떼고 관람 불가의 비디오를 볼 때의 순진한 표정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들의 순수한 행동들이 오히려 너무 안일하게 처리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의 사회에서의 고립을 초래한 결정적인 이유는 부패한 사회 구조 그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각각의 애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성격과 모습은 한 마디로 극단적이다. 반골 성향에 반항적이면서도 정에는 관대한 무소속, 여성스러운 면과 소심한 성격의 섬세, 비만과 게으름으로 무위도식하는 삼겹 등 한 마디로 이들은 모든 인물군을 특징별로 나누어 세 가지로 분류하여 가장 전형적인 인물상을 만들어낸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러한 인물들은 주변에서 보기 힘들지만, 반면에 누구나 이 세 인물의 성격들 중 몇 가지를 추출하여 합성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극단적인 성격들은 그 캐릭터들에 의해 영화 속에서 단적으로 부각된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 속에서 포기하게 되는 노력의 부산물을 통해, 그리고 군대라는 체제의 공통분모를 통해 가시화된다. 전자는 그들이 각각 희망을 잃게 되는 요인들, 즉 무소속의 만화, 반항적 성격과 청각상실, 섬세의 미용과 여성적 성격, 그리고 삼겹의 비만과 나태 등이며, 후자는 군대에 대해 그들이 갖는 생각들이다. 특히 여기서 군대는 그들에게 반드시 피해야 할 난관으로써, 또한 후에는 지긋지긋한 세상의 도피처로써 동시에 인식되는 데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여러가지 사회적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캐릭터들이 극단적이라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수용한다. 장점이라면 감독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펼쳐보일 수 있다는 것과 영화를 짜임새 있게 추진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물의 대비를 통한 부수적 효과 등을 들 수 있으며, 반면 단점으로는 현실감의 부족과 그로 인한 관객과의 유리 등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이 영화를 리얼리즘 영화로 간주했을 때 현실성 부족의 측면은 커다란 타격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결국 여기저기에서 실패한 그들은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청각을 상실한 무소속을 맞이한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되고, 그들은 이제 제각기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에필로그의 장면들은 그래서 더 비극적이다. 그들을 제외한 세상은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은 모순된 세상 속에서 너무 큰 시련을 겪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인 배우인 세 친구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더불어 세 명의 주연 남자들과 함께 몇몇 조연의 캐릭터들도 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특히 동네의 꽃집 여자와 미장원의 여인, 그리고 그 여자의 깡패 같은 남자 등은 영화를 리드미컬하게 이끌어주는 데에 공헌한다. - 비록 비오는 날 무소속이 꽃집 여인에게 바람맞는 장면의 유치함을 인정한 다고 할지라도...
PS>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무소속이 정작 가정에서는 반항하지 못하는 이유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몰고가서는 곤란하다. 다만 가족제도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것은 인정할 수는 있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가부장제는 리얼리즘에 근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담벼락에 기댄 친구들 : 리얼리즘의 영화
이 영화는 보통 남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런 목적 없이 살다가 군대라는 체제 앞에서 망설이는 청년들에 관한 감성적 다큐멘터리이자, 비정한 사회 속에서 좌절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메마른 드라마이다. 두 스타일의 사이에서 영화는 자연스레 리얼리즘의 스타일을 취하는데, 이것은 때로 파격되기도 한다.
크레인 쇼트로 시작하는 영화는 카메라 움직임을 절제하고 특수효과를 자제하며 여러 카메라 기법들을 무시함으로써 스토리 자체에만 몰입하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 음악의 사용을 절제하고 인물의 움직임을 비교적 제한한 장치들은 관객을 영화 속에 동화되지 못하게 한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서술의 이러한 방법론은 <우중산책>의 스타일을 많이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 상당부분 그 꼼꼼함에서 많이 탈피한 것도 사실이다.
 우선 가장 먼저 지적될 부분은 무소속의 플래쉬 백 장면과 상상의 장면이다.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내러티브가 어느새 과거와 미래로 잠깐 동안의 시간 여행을 한다. 리얼리즘의 이러한 파격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유야 어쨌건 어쩌면 잃은 것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손실된 주요 덕목은 통일성과 객관성이다. 두 번째의 파격적 요소는 곳곳에서 보이는 점프 커트의 유머러스한 사용이다. 삼겹이 비디오 가게에 채용되는 장면에서의 재빠른 커트 전환을 보라. 마치 우디 앨런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의 편집은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세 번째는 몇몇 클로즈업 쇼트들이다. 이 영화에서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파격을 일으키면서까지 대부분 극적 사실감과 함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삼겹과 그의 여동생이 함께 줄넘기를 하는 장면에서, 두 발의 클로즈업 이후 컷 백(cut back)으로 이어지며 투 샷(two shot)으로 바로 잡아내는 씬이라든지, 무소속이 군대에서 고참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에서 고참 얼굴의 클로즈업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리얼리즘을 빙자한 클리쉐도 눈에 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무소속이 꽃집 여인을 찾아갔다가 비를 맞으며 돌아오는 장면인데, 이 부분은 그 작위성과 때아닌 낭만주의 등으로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씬은 플롯 상으로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카메라 움직임이 거의 배제된 덕분에 역효과를 얻은 몇몇 장면들이 있다. 하나는 영화의 앞뒤로 배치되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순환구조를 장식하는 크레인 쇼트들이고, 또 하나는 후반부의 서서히 진행되는 줌 인이다. 군대에서 돌아온 무소속을 반기는 친구들의 사이로 천천히 전진해 들어가는 줌 인은 관객을 긴장하게 하고, 마무리되지 않은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작용한다. 이 부부은 비록 리얼리즘이 장치에 의해 대체되고 위협받은 부분이긴 하지만, 그 적절함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세 친구>는 기본적으로 사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곳곳에 그 파격을 통한 적절한 효과적 장치들을 숨기고 있는 영화이다. 그러한 일탈의 부분은 가끔은 눈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신선하다는 점에서 너무나 평범할 수 있었던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지극히 사실적인 기법들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리얼리즘을 그 토대로 갖게 된 배경에는 소박한 소재들과 함께 스타일 상의 일탈을 통한 대비가 적절하게 배합되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담벼락에 기댄 친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현상과 함께 그들의 독특한 이미지를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3. 소외된 세 친구들의 목소리 : 플롯의 분배법칙
크레인 쇼트들의 순환구조에서부터 인물이 등장하는 내러티브적 장치에 이르기까지 잘써진 시나리오와 훌륭한 촬영 및 유연한 편집은 삼박자를 이룬다. 각 인물들은 충분히 계산된 시간을 할애받았으며, 플롯은 사건들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캐릭터 안배의 효과적인 방안은 타 캐릭터를 통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즉, 미용실의 거울을 통해 섬세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면, 다음 장면은 바로 섬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유연성은 세 인물을 동등하게 안배하면서 영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간다.
첫 장면에서 함께 모였던 이들은 이후 얼마간 각자의 생활을 하다가 영화의 30분 쯤에 다시 만난다. 그들은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으며, 여기에서 처음으로 이병우가 담당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그 후로는 세 인물이 둘씩 따로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면서 영화가 진행되는데, 음악이 나오는 부분은 러닝타임의 80분과 그 이후의 마지막 부분, 이렇게 단 세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다. 영상과 사실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소홀해져버린 음악의 부수적인 사용은 그마저도 영상미에 가려져 장식적인 효과 조차도 내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음악적 장치는 관객의 감정을 절제하게 하면서 동시에 영화 자체를 감상주의에서 구출해내는 데에 기여하는 요소이다.
전체적으로 군대문제를 경계로 전자와 후자로 나눌 수 있는 플롯은 여러 반복되는 사건들을 통해 일상성 속에서 각각의 이미지들을 분할하며, 캐릭터들의 성격을 단적으로 몰고 간다. 또 에피소드식 나열인 사건들은 철저히 인과율에 충실하고, 전자에서 후자로 진행되어 나아가면서의 미묘한 분위기 변화는 희극과 비극의 페이소스를 유지하는 선에서 플롯을 심화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내러티브의 일상성의 반복은 진행되는 플롯을 강화시켜주며, 그에 따라 웃음을 자아내던 것들이 서서히 비극적으로 바뀌어간다. 시작과 끝이 특 별히 정해지지 않은 이 영화에서의 순환구조는 영화의 내용이 우리의 삶 자체를 다루는 것처럼 세 친구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 장면들을 자유자재로 교란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관객과 영화는 동시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마치 많은 일이 벌어졌던 것처럼 느끼게 된다. 점차적 증진의 내러티브는 순환의 플롯으로 천착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사회에서 버림받은 세 친구들은 영화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낮게 조금씩 깊이를 더해가며 표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 상처받은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 : 사회적 장치로서의 영화
 임순례 감독은 이 영화를 기본적으로 상업영화로 간주한다.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았고 또 어느정도 흥행을 고려했으니 그럴 만도하다. 비록 제도권 밖에서 제작되었고 또 독립영화의 규모로 만들어졌긴 했지만, 이것은 단지 저예산 영화일 뿐이지 요즘 한창 논의되는 독립영화는 아니다. 사실 이런 개념 범주의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고 어쨌든 공통점은 이 영화 속에 사회적인 목소리가 비교적 낮은 음량으로 함의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점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항상 꼬리표처럼 떠맡게 될 문제일텐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회 속에서의 영화의 기능에 관한 것이다. 이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고교졸업으로 더 이상의 학교 진학을 포기한 청년들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노력하긴 하지만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비관적인 삶을 산다. 그리고 그들은 삼류 애로 영화나 '뭔가 화끈하게 까무라칠만한' 영화들만을 골라보는 임순례 감독의 영화관을 기준으로 하자면 주파수가 맞지 않는 인간군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영화와 사회와의 갈등이 발생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친구들이 실제로 봐주었으면 한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그려낸 영화 속 친구들이 과연 이렇게 '시시한' 영화를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감독은 나름대로의 자의식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심의를 통해 '연소자 관람불가'의 등급을 받았고, 코아 아트홀 등 몇몇 특수 소위 예술 영화관을 통해 개봉할 예정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영화의 관객층은 대부분 대학생들이나 혹은 어느정도 사회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결국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를 십분 적용하거나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즉, 영화는 (주로 계층과 유통과 심의를 포함하는) 사회적인 여러 장치들 속에서 고립되고 구속받는 것이다.
<세 친구>의 상처받은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애처롭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으며 단지 건조할 뿐이다. 하지만, 그 건조함은 영화 속에서 나름대로의 포용력을 가지며 세 친구 전체를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건조함 속에 스며든 온기, 바로 그 따뜻함이 영화의 외부로도 새어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5. 세 친구와 빗속에서 산책을... : 임순례 감독론
1960년 출생으로 한양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파리 8대학에서 [미조구치 겐지에 관한 연구]로 영화학 관련 석사 학위를 받고, 1994년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연출부를 거쳐 19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16mm 단편 <우중산책>으로 최우수 작품상 및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계에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떠오른 임순례 감독은 한국의 유일한 극영화 여성감독이라는 가시적인 요소 보다는 그 영화작가적 역량으로써 평가받아야 할만한 감독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일생 동안 자신의 야망이나 환상에 대한 끊임없는 배반을 경험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 말은 임순례 감독의 작품 성향을 잘 대변해 준다. <세 친구>가 그녀의 장편영화 데뷔작이기에 아직 확언할 바는 못되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영화 속에서 그려진 인물들은 사회 속에서 상처 받거나 그들만의 꿈과 현실의 모순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이다. <우중산책>의 삼류극장이라는 공간에는 재수생, 실업자, 중풍노인 등 인생에서 낙오했거나 애초부터 꿈을 접어버린 사람들이 즐비하고, 그 속에서 '강정자'라는 인물은 수많은 영화 속의 남자를 이상향으로 삼고 현실을 체념하며 살아가는 여인이다. 또 <세 친구>에서 보여지는 사회는 가식적, 비가시적 폭력으로 얼룩져 있으며 그 속에서 세 주인공 '무소속', '섬세', '삼겹'은 적응하지 못하고 점차로 도태되어 간다.
그녀가 그리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두운 반면, 이러한 암흑 속에서 그녀는 감각적인 유머도 잊지 않는다. <우중산책>과 <세 친구>의 부수적인 조연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것인데, 이렇게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스며드는 유머 감각은 지금까지 그녀가 지향하는 영화의 스타일인 사실성을 더해준다. 이것은 에밀 쿠스트리차, 이리 맨첼, 키에슬롭스키, 안토니오니, 미조구치 겐지, 오주 야스지로 등과 함께 난니 모레띠와 우디 앨런도 좋아한다는 감독의 영화적 성향이 농축되어 발효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 속의 웃음은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막는 범위 내에서 철저하게 차단된다. 그녀는 음악의 사용을 절제하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극단적인 영상을 억제하면서 감정의 폭발을 막고 영화를 있는 그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플롯들은 모더니티와 리얼리즘의 사이에서 쌍곡선을 그리고 우연적인 사건의 배제를 위한 철저한 인과율의 적용은 영화를 답답하면서도 최대한 사실적으로 몰고간다. 그래서 클라이막스 없는 두 편의 영화들은 제대로 숨쉴 곳을 찾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 아우라의 변화를 통한 새로운 호흡이고, 이것은 <우중산책>에서는 비오는 날 한 남자를 보고 뛰어 나가는 '강정자'의 허탈한 심정을 통해서, <세 친구>에서는 세 친구에게 어느날 갑자기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군대 문제를 통해서 전달된다.
<우중산책>에서는 단지 현실과 꿈의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결국 현실에 안주하는 인물을 그렸다면, <세 친구>에서의 세 주인공은 상처받고 버림받은 그들의 앞길을 어둠이 가로막고 있다는 암시를 줌으로써 영화를 더욱 비관적으로 매듭지었다. 그렇다면, 감독이 생각하는 사회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암흑 속을 나쁜 시력에도 불구하고 전진해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여정과도 같은 것일까? 하지만, 영화의 메시지가 암울해진 데 비해 표현의 기교들은 예전보다 더욱 경쾌하다. 이것은 단편영화와 장편영화에서 오는 기술의 차이와 파나비전 효과 등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임순례 감독의 영화관 - 영화는 쉬워야 하며 관객과 호흡해야 한다 - 에 기인한 것일 확률이 더 높다.
PS> 하지만, 그녀가 쉬운 영화를 주장하면서도 헐리우드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헐리우드 영화의 소재들이 인간에게 있어 일생에 한 번 일어날까말까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룬다며 사실성의 부재를 비판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쉬운 영화를 통해 인간 계몽이라도 하려고 하는 걸까? 그녀는 알아야 한다. 만약 헐리우드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영화가 마치 미술 작품처럼 박물관이나 전시회에서나 볼 수 있는 예술적 가치로써만 취급되는 사회에서 '개인 영화전'을 준비하기 위해 영화를 구상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상업적 전략이나 기술적 전술은 인정되어야 한다.
<우중산책>의 강정자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배반될 수 밖에 없는 꿈을 꾸다가 다시 끔찍한 현실로 되돌아 오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등장한 임순례도 그녀의 이론적 역량과 실제적 영역의 사이에서 이상적인 사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녀가 신봉하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솔직 담백한 영화를 만들고, 우리의 삶과 밀접히 연관된 영화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아직 미흡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일말의 작가정신이 들어있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녀가 지금까지 빗 속에서 세 친구와 산책하던 이 길은 그녀에게 있어 겨우 출발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 친구>의 작품성으로 다시 한 번 인정 받은 임순례 감독은 이제 그녀가 처음 영화를 찍을 때와 비슷한 형태의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은 크게는 자본의 손길과 스타일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 다큐멘터리의 변영주 감독을 제외하고 극영화 부분에서 한국 영화계의 유일한 여성 감독이라는 부담스런 짐을 짊어진 그녀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이제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그리고 산책로에서 비포장 도로로 접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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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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