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도원> 꿈은 누가 꾸는가 :::
여임동 | 2000년 02월 01일
조회 1383
감독 : 후루하타 야스오
출연 : 다카쿠라 켄
9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만났습니다. 철도원과의 만남은 이 영화의 흥행을 담보한 일본 노년층의 꿈과 만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들의 꿈이 투영된 일종의 <상상화>라는 푯말을 영화 <철도원>에 붙이려는 것은 이른바 <장인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전후(戰後) 사회를 살려낸 그들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그들 자신의 소외감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짧게 표현하자면 영화 <철도원>은 아버지 세대가 꿈꾸는 아버지 (바로 그들 자신) 이야기입니다.
영화 <철도원>의 정서는 <복고>의 정서입니다. 그리고 그 복고는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바탕으로 합니다. 꿋꿋한 장인정신을 가지고 살아온 아버지와 그렇게 살아 오면서 그 자신이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회고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아주 정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영화 <철도원>의 눈물 겹도록 따듯한 감정은 마치 손님이 별로 없는 곳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철저히 해내는 철도원 그 자신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진실로 장인정신을 가진 분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의 가족일 것입니다. 아버지 부재의 이유가 어떤 것이었든 (그것이 장인정신이라는 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부재의 고통을 고스란히 짐진 자는 바로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사사로운 감정에 빠져든 것이라고 비판할 지 모르겠지만 아내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귀여운 자식이 병에 걸렸을 때 철도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철도역이 아닌 그의 아내 곁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영화를 유쾌하게 보지 못한 절대적 이유는 아닙니다. 오히려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이 철도원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 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구원을 얻어가는 방법 그 안에 감독의 생각과 관객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도원은 그러나 반대쪽 길로 멀어져 갑니다. 영화 표면만 본다면 철도원의 딸이 유령이지만 오히려 이 영화에서 유령은 철도원입니다. 감독과 관객이 꾸는 꿈의 주인공은 철도원의 가족(아내와 딸)이 아닌 철도원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철도원이 하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것 뿐입니다.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그의 아내/딸/친구/동네사람 들입니다. <꿈>은 다른 것들을 통해 자신을 그리는 무의식 작업입니다. 꿈에 나타난 상황/인물/사물 들이 꿈꾸는 자 자신의 무의식에 숨겨논 욕망을 드러내는 것처럼, 감독과 관객이 몰입하는 인물 철도원은 그 의미가 텅 비어있는 존재며, 다른 등장 인물들은 철도원이 무의식적으로 희망하는 그저 그 자신의 소망일 것입니다. 실체가 없이 희망(원한)만 있는 유령 말입니다.
영화에서 철도원에게 다가와서 용서하는 것은 그의 딸입니다. 하지만 먼저 다가가서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분명 철도원 자신이었습니다. <영화>가 진정으로 영화 밖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하였다면 영화의 정서는 쓸쓸하여야만 했습니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을 동반하여야만 하며 그 그리움의 주체는 고통받은 자여야만 하며 그것이 영화적으로 표현되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그리움은 부재 대상에 대한 진실된 비판이 있은 후에 나타나야만 할 것입니다. 왜 그것이 부재했는지, 그 부재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러나 영화 <철도원>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아버지세대>의 입장을 대신 설명해주는 장치로 변질되어버립니다. 영화 마지막에서 <찬가>를 받는 사람은 장인정신의 아버지며, 그의 아내와 딸은 고통을 축복으로 승화시키고, 아버지로 인해 깨어진 <가족>은 떨어진 파편 존재인 아내와 딸이 그를 용서함으로써 다시 뭉칩니다. 대체 철도원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영화 <철도원>을 <상상화>라고 칭한 것은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 현세대 젊은 이들이 바라보고 느끼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이야기, 사회적으로 보면 현세대의 관점이 배제된, 고통받은 사람들의 입장은 존재하지 않는 (고통받은 자는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한쪽 만의 <꿈>입니다. 현세대의 딸은 그저 아버지를 용서하려고 만들어진 아버지의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가 유령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것이 적절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영화가 바라는 것은 가족의 화해입니다. 하지만 꿈을 꾼다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철도원>을 보고 감동의 눈물은 흘릴지 모르겠지만, 진정 현실 밖 가족의 화해를 돕는 길은 영화관 안에서 흘리는 개인적인 눈물이 아닌 집으로 돌아가서 나누는 따듯한 말 한마디 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진정한 꿈을 담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영화 그 자신이 타인을 (다른 가족 구성원 - 성별/계급 등등으로 나누어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의 장이 될 때입니다. <철도원>에서 목소리를 내는 건 단지 아버지 일 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꾸는 꿈에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아버지의 꿈이 반영된 목소리를 자기 목소리 인 척하며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철도원>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전 이상하게 착한 사람들만 존재하는,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 마치 신기루 같은 아주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본 듯 합니다. (현실은 배제된 그래서 절대로 도달할 수 없고 어느 무엇도 할 수 없는 꿈) <화해>와 <용서>는 분명 이 힘든 세상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삶의 미덕이지만 그것이 쉽게 그저 한쪽만의 일방적 꿈으로서 이루어질 때는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권력을 지녔던 사람들이 꾸는 꿈에 피억압자가 출연해야만 한다면 그것 생각만해도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입니까? 지금 우리 현실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현실에서 꿈꾸기를 소망합니다. - (사족)
미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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