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이시>- 좀비 여고생만으로 장사가 될까? :::

윤현호 | 2004년 03월 15일 조회 6537
교생 선생님을 남몰래 짝사랑 할 여고생 이름으로나 어울릴 듯한 '스테이시'라는 제목은 좀비 호러물 <스테이시>에서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만다. 21세기 초 세상은 원인을 알 수 없는(아마도 병을 창작해낸 작가조차도 끝까지 생각하기가 귀찮았던지...) 이유로 여고생들의 좀비화 현상이 가속화된다. 여고생들이 이 지경이라 원조교제는 줄어들었지 모르나 출생률 제로의 아찔한 세상이 되버린 것. 자기 눈앞에서 딸이 좀비가 된다면 아버지는 과연 전기톱을 들 수 있을까? 게다가 스테이시들은 생명력도 질겨서 165조각으로 절단을 내야 하는데 말이다. 오호! 통제라...
<스테이시> 시나리오의 시작은 이렇지 않았을까? '여고생들에게 좀비 분장을 시켜보는 건 어떨까? 그것도 단체로다가...' 일본영화 특유의 교복 페티쉬가 호러 영화마저 강탈하고 말았다. 15세에서 17세사이의 여고생에게 불시에 찾아온다는 스테이시 현상은 하필 교복을 입고 있을 때야만 좀비가 된다는 설정이다. 정녕 여고생들은 잠옷도 교복이란 말인가? 교복에 집착하는 상상력 한번 불량스럽다. 허나 세일러복의 수십 명 좀비가 보여주는 군중씬은 그 자체가 진귀한 풍경이다. 강시처럼 두 손을 쳐든 모습이 우스꽝스럽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영화의 유일한 밑천인 '좀비 여고생'은 의심할 바 없는 미덕이다.
학살 영화(공포 영화는 별개의 의미로)의 목적이 신체 절단과 내장 기관전시를 통해 관객들을 구토시키는데 있다면 <스테이시>는 좀더 야심이 큰 경우다. 몸뚱이에서 목을 잡아당기니 긴 척추뼈가 고스란히 딸려 나오는 장면처럼 잔혹미의 극한을 달리지만 잔혹한 영상 사이사이로 영화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자신을 죽일 권리를 주겠다는 여고생이나, 스테이시 격파대원의 살육에 대한 딜레마 따위가 그것이다. 물론 가장 행복할 때 죽고싶다는 순정만화적 감성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신체절단과 내장 기관 속에 묻혀버리고 만 것을. 감독의 머릿속에만 떠다녔을 의미들은 공포가 쉽게 드러나는 성격에 비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끝내 고백하지 못한다. 게다가 학살 그 자체보다도 메시지 전달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학살 영화적 재미마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양다리 걸치기는 결국 영화를 교복에 집착하는 소재주의 영화로 전락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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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현호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서 '바람'의 존재를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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