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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어줍잖은 미로속에 갇혀버린 근대 :::


kwang92 | 1999년 12월 01일
조회 2565


감독: 유상욱
출연: 김태우, 이민우, 신은경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추'의 두 작품만으로도 움베르트 에코는 그 명성에 걸맞는 이야기꾼임을 쉽게 드러낼수 있었다. 무엇보다 '장미의 이름'이 사물과 추상적 세계관의 해석과 전달이라는 부분에 대한 에코의 기호학자적 취향을 드러낸 것이라면 '푸코의 추'는 근대 과학이 만들어낸 세계의 한 보편성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 자체가 뒤짚어 질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할만하다.

이번에 보기 싫었지만 어쩔수 없이 보게 된 영화 (이유를 설명하자면 간단 하다.시험보기 전날 머리 쉰다고 보게 되었으니^^;)'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또한 에코의 '푸코의 추'에서 등장한 프리메이슨의 비밀결사와 예수회의 선교자들, 그리고 가공의 역사적 사실들, 그 와중에서 오역되고 곡해되는 언어의 장난들을 한국이라는 변방의 식민지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바꿔치기 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 보자면 포맷은 빌려올 수 있더라도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기호의 역량만큼은 충분히 구분되어야 할것이다. 이후 영화적 각색의 전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차근차 근 다루어 보기로 한다.)

우리의 덕희, 스스로 이상이 되려하는가?

극중 주인공 덕희의 도발에 의해서 시작된 mad이상 동호회는 은유적으로 순결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6세기 신대륙의 발견 이후 예수회는 십자군 전쟁시기때부터의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임무 즉, 성지수호와 예수의 은총을 드러내기 위한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충실 히 해나갔다. 물론 그들의 또다른 이면의 역사로는(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야사(野史)라 칭할수있겠지만) 유태인의 세계지배음모(프리메이슨의 고유 한 임무이며, 혹은 유태인 박멸을 주도한 주체라는 설도 있다.) 의 저지와 새로운 성지의 발견(즉 식민국가의 확대/제국주의)를 위한 첨병인것이다. (여담이지만 최근에 예수회의 창시자인 료욜라가 주체적 삶의 10대인물 중 의 하나로 끼어들게 되었다.)

그러니 mad이상동호회의 참가자들에게도 그 어떤 의문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태경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차지하더라도 그외의 다른 인물들 또한 약간의 개인적인 즐거움만이 있을뿐인데다가 그것을 모면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 또한 현실적인 이유들(기사, 논문자료, 이상의 자화상, 혹은 음악과의 접목)이라는 점으로 애써 설명코자 하지만 근원적인 참가 이유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서 음모이론(혹은 대체역사의 세계관)은 이미 그 가설의 토대를 잃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원작소설과 에코의 소설 그리고 영화를 모두 비교했을때의 사항이다.) 결국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유상옥 감독의 전작 피아노맨처럼 아무런 의문 도 없이 단지 유아기적 행동만이 남아있는 살인자로부터 시작되어서 역시 아무런 의문도 없이 유아기적 호기심으로만 모인 피해자들에 이르기까지 세계관 자체가 결핍되어 있는것으로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은가? 멜깁슨의 '컨스피러시'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피해망상증의 인물성을 그런대로 드러내고 있지만, '건축~'에서는 직업과 할일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못해도 네다섯번의 모임에 꼭 참가하고 있다...)

그것을 영화에서는 '덕희의 카리스마'라는 한 구절로 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중간에서도 나는 그것이 영웅상의 회복이라는 점으로 암시를 걸고 있지 않는가의 불안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푸코의 추가 비약은 또 다른 비약을 부르고, 시작된 곡해는 결국 돌고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오는 뫼비우스의 띠임을 직시할수 있게 만든다면 건축~에서는 출발점은 있되, 착륙점은 지평선 너머가 되어버리는 오류 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영화적 각색이라는 재해석의 과정에 영화적 장치 를 위한 변이를 통해서 잃어버리게 만든 요소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그리고 천재보다 더욱 뛰어난 독재자

앞에서 일말의 불안감에 대해서 언급했으니, 아예 한번 집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우선은 원작 소설에서도 비슷한 구성 이었던것으로 기억은 되지만 (그러나 실제로 원작에서는 금궤가 주요 모티브를 차지한다.) 극중 1719부대(어감조차 가만히 들으면 731부대와 비슷한 식으로 들릴 수 있다. 앞의 1자를 무의식중에 작게 발음하는 극중 덕희의 대사를 유념하길) 에 존재했던 1명의 유일한 조선인, 그리고 그 이름은 우리 근대사를 형성했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극중에서 그의 눈을 통해서 보이는 것은 잔인하게 피를 빠는 하야시 나츠오의 모습은 조선의 생혈을 빨아 먹는 일본식민주의의 상징이 되며, 불멸의 하야시 나츠오는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는 식민지 역사의 남겨진 편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를 상징하는 하야시를 막고자 하는 박정희 야 말로 진실한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귀납적 결론으로 도출해 나아가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발상으로 쉽게 도착해 버리는 것이다.

즉, 근대화란 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의식적인 근대화도 포함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이룩한 근대화는 물질적 근대화, 그리고 가족적 국가관을 모델로 한(그 전형적 시범케이스는 일본의 천황중심제가 된다.) 대중통제(지배적)의 근대화였음을 무시하고 영화는 전적으로 물질적 근대화 를 옹호하게 되며 그런 근대화란 이상의 근대건축으로 상징되어버리는 것이다.

곧 천재의 건축물과 그리고 그 근대화의 시발점을 옆에서부터 지켜보던 위대한 지배자의 역사(가상의 역사임을 전제로 두고 있지만...)였던 것이라고 주장코자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쉽게 말해서 박정희는 이미 민족의 운명을 막고자 하는 하야시의 음모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이상과는 달리 그것을 묵도하였으며, 이후 정권을 잡고 나서도 이를 막으려고 했다는 식의 설명이 되어버리면(z백호팀의 존재는 그것때문에 가능해진다.) 결국 쿠데타와 유신도 국가와 국민을 살리기 위한 살신성인의 논리로서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유신의 망령은 그것 자체의 생존력 때문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의 역학관계에 기반함이 오히려 더 큼을 안다면 더더욱 동의할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미신과도 같은 현실(kino 유상욱씨의 글은 이를 뒷받침 한 다)과 식민지로부터 시작되던 근대화의 오류를 모두 하야시라는 일본의 망 령에게 뒤짚어 쒸우고 그 대칭점으로서 영웅으로서의 박정희와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주인공들의 행동으로서 보상받으려 한다는 점이 극의 리얼리티에 대한 치명적인 단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물론 파악할 수 있을때의 지적이다. 이는 원전소설에서 '금궤'라는 물질적 욕구가 더욱 전제됨을 유 념할 때 가능해진다.)

감독 또한 이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그것은 전작 피아노맨 부터 이번작품에 드러나는 아버지라는 주제에 대한 감독의 의미 부여에서 찾아볼수 있을것이다.) 감독은 현실에서의 중고등학생들의 예를 들면서 아버지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내리면서도 그것이 현실에서 표출 될 때는 독재자의 카리스마가 차지해 버릴 수도 있음을 전혀 고려치 않았 던 것이 아닐까?

태경, 너는 왜 나왔니?

주인공들의 구도는 역시 예상했던 대로 x파일 식의 구도가 되어버림을 영화를 보고 난후 kino에서의 인터뷰에서 확인할수가 있었지만, 극중의 태경의 역할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스컬리라기 보다는 비약적인 결론 도 출을 이끌어내고 무지몽매하게 따라만 다니는 여성이자 민중의 역할만 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 무슨말을 할까? 이 세상이 이렇게도 음모에 싸여있고,그것을 파헤치려는 (혹은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고 믿는 이들 에게 음모이론이야말로 세계를 구성하는 축이 되며, 그 극단에서는 조직적 학살과 원자폭탄의 투하와 멸망해가는 문명의 잔해만이 보일 뿐 인데. 결국 진실이란 것을 찾아헤매는 멀더(용민)과 스컬리(태경)는 역시 x파일에서처럼 손전등만을 든채, 진실과 맞닥트리지만 그 진실이란 것 또한 스컬리의 독백처럼 '믿음이란 그런 것이겠지요'라는 인간의 의문없는 믿음의 실체에 명목을 주는 것 이외가 아니게 된다. (영화를 보고나서는 친구에게서 최근 씨네 21에서 영화속의 여성상에 대해 서 태경에 대한 비판적인 문구가 있었다고 얘기도 듣게 되었다.) 결국 극중에서의 용민과 태경의 조인트는 일종의 서브 텍스트적인 의미도 갖는 반면에 반할리우드 공식의 심각한 폐해성도 한꺼번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출발점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라!)

다시 돌아와서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는 근대의 실상에 대해서도 혹은 근대화의 정의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며 한아이가 뛰어나가면 두번째 아이가 뛰어나가듯 계속되는 긴장유발과 피해의식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면서 그 실체(가상역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유발시키기 위한 한편의 헐리우드 공식을 따른 영화가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원작이 따르던 세계관과 텍스트적 의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남은 것은 가상현실이라는 영화적 맥락, 그리고 그 가상 현실 속의 가상역사에 대한 맹목적 믿음(일본의 철심박기와 풍수지리사상으로 보는 중앙청의 모습등은 이미 일반에게도 널리 배포되었고, 또 학술적으로 도 계속해서 연구되는 주제인 것이다, 여기에는 정사를 믿지 못하는 대중 들, 그리고 야사를 선호하는 대중, 그리고 그 극단에서 움직이는 일본에 대한 논리적이지 못한 비판들이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달고서 또 하나의 세기말적 망령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만이 남아버리게 되었다.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특수성과(물론 역사학적 보편성에 기대어 보자면 할 말이 많아지게 되겠지만) 어줍잖은 민족주의 의식, 그리고 역시 어줍 잖은 근대화의 시기를 배경으로 우리의 이상은 오늘도 날개를 펴지 못하 고 박제가 되어버렸고, 그 박제를 보면서 아직도 어떻게 날것인지를 고민 하는 현대 젊은이들의 모습은 겹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답으로서 제시된 것은 덕희의 아버지 (혹은 박정희)의 계보를 찾아나서는 것이 되어버리며 그 와중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토록 경멸 하는 파시즘의 입구(그 키워드는 대중문화, 민족주의, 그리고 파시즘이 되어버리며, 그 연장선상에서 '유령'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감독은 자신의 전작에서의 작가적 관점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례로 삼성에서 감독에게 영화개봉전까지도 제시한 프로롤그 부분에서의 덕희의 납치에의 제의는 영화라는 자본을 둘러싼 게임의 논리가 얼마나 여실히 드러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다면 작가주의란 그것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인가?)

그러나 아직도 갈길은 멀고 할일은 많은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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