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가 돌아왔다 :::
양유창 | 2001년 11월 20일
조회 3347
"그가 돌아왔다." <컬러 오브 머니>에서 폴 뉴만은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시사회장에서 데이빗 린치의 팬들도 같은 말을 외쳤다. 사람 좋은 할아버지 이야기 <스트레이트 스토리>로 팬들을 당황시켰던 그가 다시 주종목으로 돌아왔다. 코미디와 환타지를 섞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 <로스트 하이웨이>와 <이레이저헤드>, 그리고 <트윈 픽스>의 중간쯤에 위치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데이빗 린치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놓은 선물상자다. 하지만, 잠깐 무작정 흥분하기에 앞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경고 한 마디. 이 영화는 모든 관객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제대로 된 줄거리를 선호하는 분들은 굳이 극장에 갈 필요 없겠다. 또, 만약 지금까지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미리부터 겁먹지는 마시길 바란다. 인간의 태도가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테니까.
1. 기억상실증
린치 영화의 주인공들이 항상 기억력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꼭 인지감각이 부족한 친구가 있었다. 몸 안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후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의 직업에 딱 맞는 대사를 읊조린다. 그 대사는 일종의 코미디 역할도 해서 제법 웃길 줄 안다. 영화의 초반은 <로스트 하이웨이>의 빌 풀맨처럼 베티와 리타가 자신의 정체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베티는 헐리우드에서 오디션을 보는 것보다 리타의 과거를 추적해들어가는 것이 더 재미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재미 때문에 벌어지는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베티와 리타는 단지 지금 만난 관계가 아니라 오래 전에 이미 알고 있던 관계일 지도 모른다. 혹은 앞으로 헐리우드의 라이벌이 될 연기자와 스타의 관계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은 리타 뿐만 아니라 베티 역시 마찬가지다.
2. 길다
 리타 헤이워드의 <길다>는 이 영화의 모티프다. 팜므파탈 리타 헤이워드는 리타 혹은 카밀라와 동격이다. 온타리오의 시골마을에서 온 예쁜 아가씨 베티 혹은 다이앤은 리타를 동경하며 LA 헐리우드를 찾는다. 길다는 남자를 꾀어내는 요부였지만, 이 영화에서 리타는 삼각관계로 다이앤을 괴롭히는 레즈비언 세계의 요부다. 지금껏 미국 B급 영화들을 비트는 데에서 자신의 아우라를 찾아온 데이빗 린치에게 길다 역시 정신분열증의 소재일 뿐이다.
3. 독법
도대체 줄거리는 무엇인가? 영화의 중반까지는 대체로 잘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리타가 옷장에서 돈을 꺼내보는 그 장면에서 베티가 갑자기 사라진 이후로는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는다. 과거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제멋대로 어울리고 역할을 바꿔 다른 인물들을 괴롭힌다. 카밀라는 왜 다이앤을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데려오는지, 그곳에서 사고를 당했던 리타는 다이앤과 같은 사람인지 좀처럼 설명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 비하면, <로스트 하이웨이>는 아주 쉬운 영화였고, <블루 벨벳>은 독특한 취향의 휴먼 드라마였으며, <광란의 사랑>은 쿨한 로맨스였을 뿐이다. 오로지 <이레이저헤드>의 직선적인 난해함 만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비견될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만든 영화일까. 한 번 곰곰히 따져보자.
 <로스트 하이웨이>는 뫼비우스의 띠의 구성을 하고 있다. 스토리가 앞뒤로 연결되면서 끝이 없이 질주하는 한밤중의 고속도로와 같은 플롯이다. <트윈 픽스>는 TV 시리즈와 영화 모두 한 인물과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인물들이 거미줄처럼 얽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즉, 음침한 트윈 픽스 마을의 로라 팔머를 거점으로 한 방사성의 플롯이다. 그런가 하면 <이레이저헤드>는 상상력의 신호와 시간을 각각 XY축으로 놓고 측정하는 오실로스코프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공장에서 지우개가 생산되는 것처럼 아주 과학적이면서도 지우개가 멋대로 작업대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추상적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이 세 편의 영화와 구성을 합쳐놓은 것 같다. 아마도 호앙 미로와 프랜시스 베이컨이 함께 그림을 그렸을 때 받을 수 있는 느낌이 이 영화에 있다. 모든 것이 기호화되어 있으면서도 그 의미는 철저하게 기표 밖에 있고, 표현이 제멋대로이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구성은 나비넥타이를 닮았다. 직선의 형태로 이동해오던 플롯이 어느 한 부분에서 곡선으로 휘더니 360도를 돌아 제 자리로 온다. 그리고 다시 반대편으로 360도 휘어진 후 처음보다 약간 진전된 지점으로 돌아오면서 영화가 끝난다. 나비넥타이의 좌우측 날개 부분에는 각각 베티와 다이앤, 리타와 카밀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두 여자주인공이 위치해 있다. 1인 2역을 하고 있는 그들은, 지금 반대편에서 다른 차원 속에 살고 있는 그들 자신, 혹은 미래에 보게 될 그들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
4. 멀홀랜드 드라이브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헐리우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꿈과 환상이 담긴 이 길은 이 영화에서 나비넥타이식의 미궁으로 들어가는 무의식의 함정으로 설정되었다. 혹은 헐리우드를 꿈꾸는 베티 혹은 다이앤의 이드(id)가 초자아(superego)를 만나게 되는 특정지점, 즉 프로이드가 말한 이데아(idea)의 길목이기도 하다. 이데아의 세계는 실렌시오(Silencio) 클럽으로 표현되어 있다. 테이프리코딩으로 완벽한 공연을 구현해내는 이곳은 <블루 벨벳>에서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Blue Velvet'을 부르는 것만큼이나 천국의 안식을 요구하는 곳이다.
린치 영화의 단골무대인 붉은 커튼이 있는 밀실은 이 영화에서 캐스티글리아니 깡패들의 보스(<트윈 픽스>에 나왔던 그 작은 남자!)가 사는 곳으로 약간 변형되어 등장하는데 역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이곳은 단지 린치랜드의 등장인물들의 상상력 만으로 재현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밖에 카우보이, 파란 열쇠 등은 린치 영화의 반가운 단골 메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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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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