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발이 너무해> 정말 리걸리 블론드 맞나? :::

강병융 | 2001년 10월 27일 조회 3908
우선 인정한다. 이 영화는 참으로 재미있다.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웃고 돌아서는 순간, 찝찝함이 머리 속에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리걸리 브론드(Legally Blonde)'는 똑똑한 백인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결국 관객은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아도 이 영화의 결말에 엘 우즈(혹은 엘르 우즈)가 바로 이 리걸리 브론드가 된다는 사실을 예감할 수 있다. 시놉은 단순하다. 백치미 철철 넘치는 주인공 엘은 남자친구한테 버림 받는다. 이유는 그녀가 너무 멍청해보인다는 이유 때문.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남자 친구는 하버드로 떠난다. 하지만 엘은 멍청하기에 남자를 잡기 위해 하버드 법대에 가고자 한다. 하지만 영화이기게 그녀의 꿈이 가능해진다. 하버드에서 엘은 무시당한다. 어느 영화에서도 그렇듯이. 그렇지만 점점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한 차례 그녀의 입지를 흔들만한 위기가 온다. 그리고 극복! 다음은 말 안해도 알겠지만, 행복한 결말이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속이 후련해지지는 않는다.
엘이 이러한 행동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런 류의 오락 영화를 가지고 흥분한 필요가 있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영화는 오락영화니 어차피 흥분한 것 계속 이어갈 것이다. 과연 엘의 개과천선이 여성으로서 아니면 인간으로서 당당히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과연 정당하고 대단한 일인가에 의문이 든다. 어떤 경위에서 엘은 성공하였다. 우선은 돈이다. 극단적일지도 모르지만, 만일 엘이 돈이 없었다면 그런 성공은 꿈도 못꿨을 것이다. 엘이 집안은 중산층이다. 그래서 엘은 졸업하고 딴 생각 하면 안된다. 취직해야 한다면. 그럼 이야기는 끝이다. 하버드에 간다해도 엘의 방식으로 공부하기는 힘들다. 런닝머신과 함께 책을 보고, 답답하면 미용실에 가서 삭히고, 컴퓨터 없으면 당장에 달려가서 수백만원짜리 애플의 이북을 살 수 있는 재력이 없었다면 엘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또한 그러한 밑바탕이 없었다면 엘이 자신감이 생겨났을까? 우습게도 엘은 하버드 학생들한테 조롱당하는 척 하지만 사실 그들은 엘을 피하고 있다. 첫째 그녀가 너무 잘났고, 너무 튀면서도 부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심각하고 엘리트인 척 하지만 사실 엘같은 스타일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엘은 처음부터 하버드 학생들보다 우위에 선 입장에서 시합을 시작하고 있다. 비교하자면 자전거를 탄 사람이 그냥 달리는 사람과 경주하는 꼴이다. 대신 자전거가 조금 늦게 출발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달리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탄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만, 결국 자전거를 탄 것이 이 시합에서 반칙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자전거를 탄 엘이 우승해서 우승 소감까지 말하지 않는가?
물론 재미를 위한 영화니까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뒷맛은 그냥 재미가 아니고, 부러움이다. 관객들은 재미만 주면 좋겠지만, 시기와 부러움을 관객에게 던져준다. 현실과 영화를 구분 못하는 무지한 관객들은 없겠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가치 없는 부러움을 준다면 좋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여자로서 엘이 다른 우수한 척 하는 남자들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여성우월적인 성향을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도 허울이다. 결국 엘은 평범한 여성이 아닌 하버드에 다니는 갑부집 딸이면서 이쁘고 섹시하고 귀엽고 심지어 추종자들까지 있는 여인이다. 잠깐만 눈을 옆으로 돌리면 그녀의 주위의 엘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는 평균 이하의 상태이다.
하버드 학생들은 잘난 척에 심각한 척하고, 옛 남자 친구는 껍질만 하버드고 예전 학교의 여자 친구들(추종자들)은 교육 및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새로운 남자 친구는 잘난 척 하지만 엘을 만나기 전까지 속물 근성의 교수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금발이 너무해>는 금발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자는 시각에도 영화를 시작하지만, 알고 보면 하버드 엘리트에 대한 편견, 교수들에 대한 편견, 서부의 부호들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로 이 역시 영화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지나친 변명이다. 끝으로 말할 가치도 없지만 코스모폴리탄이나 주인공 이름으로도 쓰인 엘르에 대한 엉터리 예찬은 짜증날 정도이다. 내가 고지식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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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병융 오넷콜맨, 살바도르 달리, 무라카미 하루키, 이제하, 장 비고, 키애누 리브스, 정성일, 쿠엔틴 타란티노, 무라카미 류, 이무영, 존 드 벨로, 김영하, 로이드 카우프만, 장정일, 디지 길레스피
- 상기 거명된 자들을 한꺼번에 믹서기에 넣고 갈아서 마시고 싶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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