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딸기> 시간이 멈추어 선 거리 :::
양유창 | 1997년 11월 01일
조회 3338
잉마르 베르히만의 침묵으로 말하자. 아니, 속삭이자. 스트린드베리와 입센의 영향을 받은 그의 영화들은 19세기 근대 연극의 사실주의, 북구의 신비주의 영화전통, 전후 세대의 실존주의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적 회의에 빚지고 있다. 어릴 적부터 엄격한 신학적 교육을 받으며 자란 탓에 그의 모든 영화들에 종교적인 구원 - 구원이라기 보다는 침묵에 가깝다 - 의 메시지가 보이고, 그러한 신앙은 그에게 존재의 본질에 관한 철학의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의 실존에 대한 사유는 초기의 희극에서 페시미즘이 지배하는 비극으로 바뀌어 간다.
 | | 빅토르 쇼스트롬과 줄란 킨달 |
연극으로 출발한 베르히만은 겨울에는 연극을 하고, 여름에 영화를 찍으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여 나갔다고 한다. 총 44편의 영화를 찍고 은퇴한 그를 두고 장-뤽 고다르는 가장 독창적인 작가라고 불렀지만, 그는 마치 이제야 리허설이 끝난 것처럼 85년 이후 무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후 86년에 <카린의 얼굴>과 같은 영화들을 만들기도 하였고, 시나리오를 계속 집필하여 그의 부인인 리브 울만과 빌 어거스트의 영화들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제7의 봉인>과 같은 57년에 만들어졌으며, 또한 <제7의 봉인>과 비슷한 주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찍어낸 영화이기도 한 <산딸기>는 그의 영화 세계의 전환점에 위치한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적 성숙을 이룩한다. 이전의 영화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듯한 난삽함을 가지고 카메라 렌즈를 실험하기 위해 만든 것 같은 어색함을 지니고 있다면, 57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는 그의 본격적인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인 것이다.
Lund 지방에 살고 있는 의사인 Isak Borg는 6월 1일 악몽을 꾼다. 그는 인적이 없는 거리에 홀로 남겨지고, 거리에는 시계 바늘이 사라진 시계, 손대면 녹아 없어져 버리는 인간, 그리고 달리는 마차를 끄는 말들만이 적막 속에 존재할 따름이다. 시계 바늘 소리와 종소리 만이 몽타주가 되어 울려 퍼지는 상상의 공간에서 그는 마차가 흘리고 간 관 속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순간 관 속의 노인이 그를 잡아 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다. 다음날, 그는 그의 아들 Evald의 부인인 Marianne와 함께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그 이후로 이 영화는 한 개의 회상 장면과 세 개의 꿈 장면을 사이에 놓는 로드 무비 형식의 구성을 취한다. 이탈리아로 가려는 한 명의 소녀와 두 명의 소년이 여행에 동참하고, 그들은 Borg의 과거 속의 삼각관계를 연상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논쟁거리로 다툼으로써 영화에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현실의 고통, 잘못과 후회, 존재의 유무, 그것은 베르히만이 다루려고 한 이 영화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의식이 흘러감에 따라 Borg의 회상의 과거 속에서 Sara를 사이에 둔 그의 형인 Sigfrid와의 삼각관계는 추억에서 이제 하나의 공포로 다가온다. Sara는 Borg의 늙은 모습을 대하고는 실망하여 Sigfrid의 아이를 데리고 그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녀는 아기에게 말한다. 바람, 새, 파도의 위험으로부터 너를 돌보겠노라고. 과거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시간이 멈추어 선 거리를 통과하여 미래를 향한 공포로 수렴된다. 그는 차 안에서 잠이 들고, 이번에는 의사로서의 자격 테스트를 받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자신감도,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그는 살아있는 환자에게 죽었다는 진단을 내린다. 그 순간 환자는 터질듯한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 웃음은 의학으로서의 죽음과 인간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신학적인 죽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의사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들린다. 그에게 그의 악몽들은 마치 죽음처럼,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보았던 관 속에서 잡아 끄는 자신의 손처럼 다가와 경계가 희미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차 안에서 깨어난 그를 남겨두고 주위의 조명이 마치 아이리스 효과를 내는 것처럼, 연극적 효과처럼 꺼진다. 이 모든 상상의 여행은 그의 무대 위에서의 방백이며, 그는 주인공으로서, 죽음을 통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피조물로서 그 여행 속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학위를 수여 받고, 세 젊은이의 축하 인사를 듣는다. 편안하게 침대 위에 누운 그의 곁으로 아들 부부의 임신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문제 - 자존심과 갈등과 종족 보존 - 가 스쳐가고, 그는 이상하고 특이한 논리에 휩싸인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꿈 속에서 그의 사랑이었던 Sara를 만나고, 그녀를 따라 강 건너 저편에서 한가하게 앉아 유희를 즐기시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본다. 그곳은 아득히 멀지만, 한여름밤의 미소가 유리를 통해 비치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고, 이제 그는 그를 지배하던 악몽을 꾸는 조종인형의 인생으로부터 그의 천사 Sara가 이끄는 죽음 저편의 세계로, 그의 인생에 대한 반성을 뛰어 넘은 안온함의 풍경으로 들어온 것이다.
<제7의 봉인>의 주제이자 베르히만 영화의 테마인 신의 침묵과 죽음의 문제는 <산딸기>에서는 정 반대의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다. <제7의 봉인>이 마녀 사냥이 만연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죽음과의 (예고된) 정면 승부를 통해 외부에서 내부로 좁혀들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산딸기>는 반대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내부에서 외부로, 그리고 디테일을 중시하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자신의 성찰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찾는다는 주된 테마는 같다. 전자는 기사가 관찰하는 현실을 통해, 후자는 노인이 돌아보는 꿈 속의 과거를 통해 현실이 반증되고 죽음이 그 현실 속에서 의인화되는 것이다.
베르히만은 60년대 이후에 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신의 침묵 3부작을 통해 그 침묵을 증명하려 하였으며, 이후에는 그 시선을 아예 여자들의 문제로, 혹은 인간 내면의 관찰로, 영화와 연극이라는 매체에 대한 성찰로 옮겼다. 이것은 당시를 지배하던 영화 조류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베르히만을 신격화한 누벨 바그 영화친구들은 자신들의 전혀 새로운 영화를 들고 나타났고, 헐리우드가 매커시즘으로 재능있는 감독들을 내몰아 버린 사이로 여러 소규모 영화들이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밖에 각 국가에서 여러 새로운 영화 흐름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유럽영화의 3대 거장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페데리코 펠리니, 그리고 베르히만은 현대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미지즘인 모더니즘으로 무장하였다. 세계 영화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치열한 영토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칼 드레이어와 마르셀 까르네를 계승한 이들은 각각 네오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시적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영화와 영화 사이에 선 것이다. 그곳에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려는 침묵의 시도가 있었고, 환상과 실제를 가로지르는 울림이 있었으며, 관계와 소외 사이에서 절망하는 사랑이 있었다. 바로 그런 연유로 베르이만의 침묵은 가능했다. 68년 5월 혁명과 베트남전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단지 나즈막히 되뇌일 뿐이었던 것이다.
베르히만과 함께 작업한 주요 촬영감독은 둘 이었다. 이 영화 <산딸기>에서 촬영을 맡았던 군나르 피셔(Gunnar Fischer)와 8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온 스벤 닉비스트(Sven Nykvist)가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베르이만과 함께할 때, 스타일 상으로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베르히만의 영화가 다분히 연극적이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모든 영화에 '연극'의 메타포를 삽입한다.
대부분의 영화 속 인물들의 직업은 연극배우이고, <톱밥과 금속조각>, <여름밤의 미소> 등에서 <화니와 알렉산더>, <리허설 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그의 영화들에서 실제로 연극을 준비하거나 공연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의 영화가 이렇다보니 촬영이 연극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다. 초기의 몇몇 영화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화들이 마치 연극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할 정도로 연극적인 장치들 속에서 촬영되었다.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은 연극처럼 비유와 강약으로 또렷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조명 또한 연극에서의 그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려 하고 있다. 그는 심지어 영화 매체의 본질을 실험한 <페르소나>에서 조차도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연극식으로 담아 내었다. 그는 일회성 공연 예술인 연극이 영화라는 기록 매체를 통해서 영원히 남기를 바랬던 것일까?
어쨌든, 이러한 특성은 <산딸기>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Marianne가 연극 배우라는 설정을 비롯해, 꿈 속 장면에서 Borg가 직접 등장하여 어릴적의 그들을 바라보는, 꿈이 상상력을 경유하여 현실과 하나 되는 상황 - 후에 우디 앨런이 <애니 홀>을 통해 기꺼이 오마쥬를 바친 - 과 그리고 실내 공간에서 조명의 조절을 통한 인물과 사건의 강조 등 많은 것을 연극으로부터 물려 받았다. 그의 이런 연극적인 성향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영화 스타일상으로 전혀 발전하지 못한, 단지 장인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연극적이기 때문에 더 놀라울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연극은 순간에 대한 열정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만약 영화도 그러하다면 그 영화는 매순간 마다 배우들로부터, 그리고 사건들로부터 힘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베르히만은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잘 알고 있었다. 연극적인 풀 쇼트 보다는 클로즈업과 공간의 수평분할을 선호했으며, 때로는 플롯을 약간 비틀어 흡인력을 강화하는 장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해 깐느 영화제 수상을 통해 베르히만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산딸기>는 의식과 무의식,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최면술과도 같은 영화이다. 한 노인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죄의식을 두드려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 본질의 문제를 질문하는 - 이것은 동양적인 주제이지만 기독교적 신을 통해 서양화된다. - 베르히만. 그는 아마도 그의 자서전적인 화려한 행복에 관한 동화인 <화니와 알렉산더>를 찍기 전까지 8번째 예언자가 되어 신들의 침묵에 관해 논증하고 반박하겠지만, 지금 바로 이곳, 그의 천사인 Sara가 사랑을 이야기하는 산딸기가 피어난 정원 속에서는 더이상 그를 회의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신앙과 삶과 그리고 니힐리스틱한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침묵이라 불리우는, Borg가 발견하고 환희에 젖은 바로 그 공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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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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