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 MTV Tapestry 글: 양유창 1997년 01월 10일
<로미오와 줄리엣>은 메가톤급 흥행 성공작 <댄싱 히어로>로 주가를 올린 호주의 바즈 루어만 감독의 헐리우드 감독 데뷔작이다. 항상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을 현대화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마따나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관객의 눈을 스크린 속에 묶어두며, 그 강한 흡인력은 관객들에게 재빨리 고전의 캐릭터들과 그 아우라를 떠올릴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영화, 96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뿐이다. 올리비에 핫세의 낭만적 로맨스와는 달리, 시간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너무 친숙한 내러티브는 관객들에게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을 선사한다. 배경과 사건의 이국적 마찰이 부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10대 우상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몇몇 관객들과 첫 10분 가량의 훌륭한 MTV 이미지를 충분히 만끽한 관객들만 영화에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1. 셰익스피어, 변화의 모습들 <리처드 3세>, <햄릿>, <12야>, <헛소동>, <오델로> 등 영화의 역사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시나리오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 이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1968년 셰익스피어와 오페라 영화의 전문가인 프랑코 제피렐리에 의해 영화화 된 바 있으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개작되어 1961년 로버트 와이즈와 제롬 로빈스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었다. 또, 가깝게는 인디펜던트 영화를 무기로 폭력의 이미지즘을 추구해온 아벨 페라라 감독에 의해 1987년 <차이나 걸>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인과 이태리인의 대립구도로도 리메이크 되었던 바 있다. 고전문학의 장점은 누구나 그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만큼 단점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알고 있기에 섣불리, 변형할 수 없고, 또 변형하지 않을 수도 없다. 또한 그 반대편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고전의 영화화는 활자화된 영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그것을 책처럼 읽으려 하고, 그럼으로써 한 편의 영화는 다이제스트 북이 되어버린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영화가 단지 문학을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졌는가? 혹은 문학을 요약하기 위해 탄생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 영화는 읽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것들'에 집착한다. 그들은 여러 상징 기호 속에서 신화학을 만들어내고, 지형도를 그리며, 나름대로 계보학을 구성하려 애쓴다. 물론, 영화도 시대의 산물인 만큼 그 컨텍스트 내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주가되어서는 안된다. 그대신 우리는 영화를 이리저리로 공간이동 또는 시간이동시키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그것이 더 이상 문학의 그림자에 가리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는 텍스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텍스트 중심주의 자체가 타파되어야 할 인습이겠지만, 시대 맥락에 따른 구별짓기가 언제나 중요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을 때, 그 텍스트들 가운데에서 영화가 가져야 할 위치는 마땅히 '기능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즈 루어만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리메이크하여 영상으로 썼다. 하지만, 그가 이 과정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 캐플렛과 몬태규 가문(혹은 패거리들), 그리고 무엇보다 머큐쇼와 티볼트이다. 철저한 상류층 백인 커플인 로미오와 줄리엣에 반해 로미오의 친구인 머큐쇼는 흑인 드랙퀸으로, 줄리엣의 오빠인 티볼트는 히스패닉으로 그려지고 있고, 이렇게 사회에서 비주류인 이들은 영화 속에서 각각 로미오를 위해, 로미오에 의해 죽는다. 이 얼마나 반항기 어린 역설인가! 또, 이야기를 소개하는 광대가 뉴스 앵커로 대체된 만큼, 전체 이야기 구도는 마치 두 마피아 집단의 대립을 보는 듯 혼란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들이 봉건제 영주사회를 뛰어 넘어 자본주의 사회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난공불락으로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세를 꿈꾼다는 것이다. 그들은 태연하게 고전의 대사를 읊조리고 가장무도회를 열어 애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시간의 변증법 - 비록 이 영화에서 그 즉자대자는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 은 20세기말에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는다는 오래된 감회를 선사한다. 2. MTV Teenage Movie ![]() 영화는 '지속'되지 않는다. 단지 영화가 있는 '시간'만이 지속될 따름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스투디움과 품크툼으로 더 큰 원을 그려보면, 봉건영주시대와 자본주의시대로 구분지어지는 두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에서 스투디움으로 의식될 가시적인 것들은 은연중에 품크툼을 내포한다. 반복이라는 원형의 울타리 속에서 변화된 이미지들이 저마다 차연의 위상학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의 태피스트리는 96년에 MTV라는 방식으로 귀착되었다. 충격적인 뉴스 보도로 시작하여 마치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처럼 차례로 소개되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너무나 명백한 이분법, 서부극의 형식을 차용한 대결구도,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자유자재의 카메라, 로드리게즈식 웃음과 다양한 접사, 춤을 추는 듯한 인물들의 동작, 실재할 수 없는 속도의 시간을 경유한 몽타주, 그 몽타주를 같은 시간 위에 하나씩 꼴라주시켜 놓은 듯한 미장센. 거기에 덧붙여 완벽한 MTV 영화가 되기 위해 이 영화는 스스로 OST가 된다. 90년대의 영상과 90년대의 음악을 바탕으로 낡은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MTV를 포기하고 드라마투르기를 강조하는 영화 종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그 어느 쪽도 서로를 흡수하지 못한다. (수입업자에 의해 삭제된 라스트 씬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단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라는 10대 스타들을 위해서라면 이 영화는 성공적이다. 캐릭터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도 이미 충분히 반항적이기 때문이다. 아르튀르 랭보와는 조금 다른 비실존 고전인물 로미오의 디카프리오, 다른 배우들에 둘러싸여 베일에 가려진 <작은 아씨들> 보다는 성숙한 [My So-Called Life]의, 결코 신데렐라가 된 적이 없는 클레어 데인스. 이들은 비록 바즈 루어만의 각색에 의해 조롱된 백인 커플을 연기하기는 하지만, '90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캐릭터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관객의 환상을 창출하기에 충분할 만하다.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