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사정 볼것없다> 성민이 걔는 내꺼야.. 내가 잡을 꺼야
글: 임지수
2000년 03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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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시사회를 갖고 처음 모습을 드러낸(배우들도 이날 처음 보는 거라고 하더군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아마도 이명세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최고작이라 고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영화입니다.
대체적으로 기자들의 반응도 열렬한 것이었으며, 특히 「유령」의 프로듀서를 포함한 영화 관계자들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울만한 영화라는 반응이었습니다.
1. 세련되고 강력한 비주얼
영화의 비주얼이란 개념은 어떤 과학 기구를 동원해서 만든 장면(특히 CG)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영화 기자재와 후반 옵티컬 효과로만 이루어진 것들을 가리키지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그런 영화 비주얼에 있어 가히 놀라운 경지에 이르러 있습니다. 그저 형사가 살인범 하나를 끈질기게 추적한다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게 그지 없는 영화의 스토리를, 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하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시각적인 힘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끝부분에 벌어지는 탄광촌의 격투장면입니다. 박중훈과 안성기가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마지막 종착역인 이 장면은 아마도 한국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일 것입니다.
적절하게 통제된 빛과 컬러로 찍었음에도 흑백이라는 인상마저 들게하는 화면의 강렬한 명암 대비는 배경 음악(비지스의 'Holiday'의 변주), 배우들의 연기, 거기에 '비'라는 것이 주는 미묘한 낭만성과 결합되어 완벽한 일치를 이룹니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는 분명히 잊지 못할 시각적 경험일 것입니다.
또한 서부서 경찰과 '영구' 우형사(박중훈)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도입부의 패싸움(이건 정말 패싸움에 지나지 않습니다)을 찍은 흑백화면(이것은 컬러로 찍은 것입니다)과 바로 이어지는 마약상(송영창) 살해 장면 역시 "이 영화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강력한 비주얼"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명세 감독의 세심함과 치밀한 연출력은 이렇게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기존에 보여 준 동화같고도 몽환적인 비주얼들은 사라졌냐고요? 대답은...
2. 동화적인 비주얼
... 아닙니다. 여전하지요. 이명세 감독의 골수팬들은 이번에도 따뜻하면서도 뭔가 가슴을 파고드는 그런 장면들을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보는 것도 여전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거울에 반사되는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더군요.
대표적인 것이 아마 우형사의 파트너인 김형사가 실수로 용의자를 죽이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우형사가 나타나, 눈을 던지면서 장난을 거는 대목일 것입니다. 상실감에 빠진 김형사는 이 장난을 거부하지만(이 대목에서 장동건의 대사와 말투는 기묘한 애달픔을 갖고 있습니다), 곧 함께 눈싸움을 하게 됩니다.
눈 내리는(이 대목은 CG입니다) 공원에서 두 형사가 서로 비슷한 감정 배경을 갖고(바로 그 전에 우형사는 여동생 집에 갔다 왔지요) 눈싸움을 하는 장면은 무언가 애틋하면서도 흐뭇한 웃음이 나오게 합니다. 고속촬영은 여기에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명세 감독만이 할 수 있는 그만의 스타일이고 힘입니다. 물론 이런 동화적인 장면을 반대로 코믹한 방향으로 표현한 것도 있습니다. 우형사와 김형사가 장성민(안성기)을 잡기 위해 잠복한 장면에서, 먹을 것을 상상하는 것이 그 예지요.
국밥을 그들 각자의 머리 한 쪽 위에 그려 놓고 여기에 고춧가루와 여러 다른 양념들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은, 기존에 그가 해왔던 익숙한 스타일 중에서 유머러스한 쪽에 속하는 장면입니다.
다른 영화의 스타일이나 배경을 인용하는 것도 여전해서, 김형사가 죽도를 휘두르며 장성민과 기차에서 맞서는 장면이나 짱구(박상면)와 우형사의 결투가 시작되는 장면 등은 서부극이나 사무라이 영화의 느낌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3. 박중훈과 안성기
1년 만에 영화를 출연한 박중훈은 코믹한 역할이 절대 아니지만, 상당한 웃음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에 범람했던 그의 캐릭터에 의존한 코미디 영화와는 전혀 다른 맥락입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박중훈의 연기는 연출과 상황에 의한 유머이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느낌마저 주고 있습니다.
안성기는 이 영화에서 킬러로 변신했지만, 초반에는 그가 가진 기존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악당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그를 쫓는 형사들이 중심인 탓에 등장하는 장면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사는 단 한마디 뿐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추격 장면에서 우형사의 차가 고장나자 그 옆을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짓는 그의 웃음은 정말로 '사악합니다'. 그는 이 웃음 하나로 이 영화에서 자칫 선한 악당이라는 역설적인 캐릭터를 맡았던 것이 아닌가하고 헷갈리는 관객들의 그 모든 의혹과 의심을 일거에 날려 버립니다.
4. 마무리와 노파심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내러티브와 갈등 구조는 사실 단순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감독이 이러한 단순함에 전혀 구속되지 않고 "영화적으로" 잘 표현하고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시나리오가 좋아서 영화가 잘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오히려 시나리오 자체(이명세 감독이 직접 썼습니다)보다는 감독의 연출력이 더 큰 힘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리얼함"입니다. 실제로 이명세 감독은 인천 서부서 경찰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시나리오를 썼고, 박중훈 역시 형사들과 밀착해서 생활하며 그들의 모습을 반영했습니다. 실제로 촬영장을 방문한 한 형사는 범인체포 장면이 매우 사실적이라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보이지 않는 위험'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훌륭하게 장악한, 바로 이명세 감독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때로는 지나치게 독특한 그만의 스타일이 관객들의 외면을 불러 온, 과거의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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