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안선 : 숙성되지 않은 보졸레 누보 :::
정영선 | 2002년 11월 24일
조회 5248
김기덕(A) 감독의 영화 <해안선>에는 어떤 요리가 적당할까요? 가장 쉽게 비유하자면 감독의 영화에 늘 나오는 ‘회’ 얘기가 적당할 텐데, 그건 너무 식상한 비유겠죠? 마침 제 앞에 오늘 나온 따끈따끈한 보졸레 누보가 있습니다. 그 얘기로 시작해볼까요?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남부 보졸레 지방에서 그 해 수확한 포도를 단기간에 숙성시켜 만드는 와인으로, ‘보졸레의 햇와인’이라는 뜻입니다. 짧은 숙성기간 탓에 보통의 포도주처럼 깊은 맛은 없지만, 향이 좋고 쓴맛이 적어 처음 마시는 사람들에게 좋죠. 11월 세째주 목요일에 전세계적으로 출시되기 때문에 그 해에 생산된 포도로 만든 최초의 와인을 전세계인들이 동시에 마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화 <해안선>은 주제의식을 너무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들은 가끔 피곤합니다. 시종일관 메세지를 관객들에게 강요하려 들기 때문이죠. 영화는 많은 광기들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감독 자신이 말했듯, 한반도를 둘러싼 망령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집단 무의식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영화속에서 다른 광기를 보았습니다. 그건 바로 스무살의 모습이었죠.
스무살 시절, 친구들은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몸무게를 줄여서 면제가 된 선배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먹물을 마시고 엑스레이를 찍으면 속이 까맣게 나와서 면제가 된다, 손가락이 하나 없으면 총을 쏠 수 없어서 못 간다, 눈을 혹사시키면 잠깐동안 시력이 떨어져서 낮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은 터무니없는 얘기들이 당시엔 무성했죠.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야기일 뿐, 대부분의 친구들은 결국 군대에 갔습니다. 군대에 간 후에도 사연은 이어졌습니다. 어떤 친구는 정신이상으로 의가사 제대를 했고, 어떤 친구는 무릎에 파편이 박힌 채 흉터를 안고 나왔습니다. 물론, 그 중엔 ‘체질인’ 친구들도 있었죠.
영화를 보던 내내 제 시선을 잡던 건 강상병(장동건)이 아닌 김상병(김정학)의 캐릭터였습니다. 사진 한 장만 찍겠다며 애원하는 민간인을 철책 안으로 들여보내고, 정신나간 동기가 위험한 줄 알면서도 덜컥 문을 열어주는 그는 유약하고 착한 군인입니다. ‘계급장 떼고 붙자던’ 군대체질인 조일병과는 정반대죠.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더 위험하리라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풍부한 감수성과 여린 심성이 다치기 쉽다는 걸 말이죠. 결국 그는 미쳐갑니다.
 물론 요즘 군대는 영화 속과는 많이 다릅니다. 제가 군대 프로그램을 1년 정도 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엔 심지어 개인용 삼푸까지 따로 쓰는 곳도 있더군요. 축구와 족구만 잘하면 군생활 핀다는 불변의 진리를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모두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여전히 위험한 곳입니다. 그 곳에서 스무살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지, 권력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을 때쯤 되면 ‘죽어도 가기 싫던 곳’은 ‘한번쯤은 가 볼만한 곳’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기존질서에 보다 잘 순응하고, 저항도 덜하게 되죠. 쓸데없이 덤벼봐야 소용없다는 걸 보다 큰 권력앞에서 번번히 좌절당하며 깨달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획일화되기에 스무살은 눈부신 나이입니다.
소설가 서영은은 스무살에 대해 ‘지나치게 시니컬하고 지나치게 용감하여 스스로 상처투성이가 되는 전설 같은 나이’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면, 그 시절. 전 언제나 무슨 일이 생겨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뭔가 커다란 일이 일어나 안온한 내 일상을 흔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죠. 모든 건 열려있고, 어디로 가도 길이었으니까요. 그것뿐인가요. 우리에겐 앞 뒤 가리지 않는 열정도 있었습니다. 여자친구가 변심했다고 총을 들고 뛰어 나가는 건, 스무살이 아니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면, 언제나 그 이후의 일들을 걱정하게 되죠.
저 역시 스무살이었다면 보졸레 누보를 예약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졸레 누보를 알지도 못했겠죠.) 단지 상술에 불과하다는 생각과 외래문물에 대한 경박한 선호라고 생각했을테니까요. 그건 여전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은 보다 느슨해졌습니다. 그만큼 세속적인 가치를 수긍하는 법을 배운 것이겠죠. 이전엔 '기의'에 집착했다면 이젠 보다 편하게 '기표'자체를 즐기게 된 거죠. 시간은 흐르고 가치들은 변합니다.
아직 숙성되지 않은 보졸레 누보. 하지만 거기엔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갓 따 낸 신선함이죠. 스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숙성된 포도주처럼 깊은 인생의 맛은 없지만 거칠고 생동감 있는 특유의 향이 살아있으니까요. 영화속엔 그 향을 빼앗긴 청춘들이 보입니다. 그건 스무살이라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향을 빼앗기고 떫은 맛만 남은 청춘들의 모습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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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선
모든 것들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물론 병조림이냐 통조림이냐에 따라 유효기간은 다르죠.
그 날 개봉해서 먹어야 상하지 않는 음식이 있고,
적어도 몇 년간은 안심해도 되는 음식이 있듯이요.
희망. 꿈. 사랑. 미래. 용기..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
당신에게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건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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