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두 : Welcome to the Iwai World :::
정영선 | 2003년 04월 27일
조회 5177
때는 1996년으로 추정되는 어느 가을. 그를 처음 만난 건 제작사 신씨네가 운영하는 서초동의 한 카페였죠. 그 곳에선 정기 상영회가 열리곤 했는데, 당시는 일본 영화가 개방이 안 됐을터라 조악한 비디오 화면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의외의 수확이었던 영화는 바로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 였는데, 정말 기발하고 사랑스러운 반전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특히 영화 중간에 흐르던 말러 교향곡 5번은 가슴이 서늘해질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이후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깊고 깊어서 거리의 담장만 봐도 <피크닉>이 생각났고, 사람들의 문신만 봐도 <스왈로우테일>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의 영화 <러브레터>가 정식 개봉하고 나서야 그에 대한 애정이 조금 시들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해서 왠지 서운했거든요.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그를 다시 만난 건 부산영화제였습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한참이나 잊고 지냈던 그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해줬죠. 이와이 슈운지. 아, 이와이 슈운지.
그의 영화 중엔 1994년작 <언두>가 있습니다. 꽤 오래전에 본 영화라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만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씩 샤워를 하다가 비누거품을 보면 이 영화가 떠오르곤 하죠. 왜냐구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오래된 기억 덕분에 흐려진 디테일의 정확성에 대해선 양해해주시길.)
사랑하는 남녀가 있습니다. 젊은 부부인 이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 소외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컴퓨터 앞에서 글 쓰는 일에만 매달려 있고 뒤에서 뜨개질을 하는 여자는 가끔씩 ‘바빠?’ 라고 물어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자신의 손에 실이 엉키는 것을 본 후 뭐든 묶기 시작합니다. 사과, 거북이, 책, 의자까지. 눈에 보이는 물건들은 모두 꽁꽁 묶는 것이죠.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결국 여자를 데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어떤 ‘강박증’이 있다고 말하며 반대로 그녀를 묶어보라고 합니다. 여자를 묶기 시작한 남자. 그러나 여자는 더 세게 묶어 달라고 할 뿐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줄거리의 이 영화는 온갖 상징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Undo. 영화의 제목은 ‘풀다’는 뜻을 지녔지만 이 영화는 뭐든 ‘묶고’ 있습니다.
외로운 여자는 강아지를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기란 어려운 일, 결국 남자는 거북이를 사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강아지처럼 거북이에게 줄을 매달고 산책을 하죠. 이 모습부터 어딘가 어설픈 관계가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녀가 사과를 힘주어 묶을 때 상처투성이로 부서지는 사과에서 그녀의 ‘묶는’ 행위가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암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얼 그토록 묶고 싶어하는 걸까요? 그건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묶어놓은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꾸만 어긋나고 소외되는 남자와의 관계를 묶어두고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미 어긋나버린 관계를 되돌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결국 그녀는 비누거품마저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묶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품처럼 사라질 것이 분명한 존재를 묶으려는 그 부질없는 시도는 이미 결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사라지는 거품을 묶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저렸답니다. 물론 그 장면이 그토록 인상깊었던 건, 그 시절 내게 있던 감수성 한 자락과 CF출신 감독답게 탄탄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었겠지만요.
 이와이 슈운지 영화의 매력중엔 ‘절제’라는 미덕이 있습니다. 그 ‘절제’란 어느 순간에 한번에 폭발해 버릴지 모르는 에너지를 숨기고 있는 것이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동안 침묵하던 주인공이 스스로 입을 열 때, 그 충격은 보다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눈이 오는 산장에서 <러브레터>의 주인공이 참고 있던 그리움을 밖으로 끄집어낼때 그 그리움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우리는 공감하게 되죠. 이렇게 그의 캐릭터들은 굉장히 내면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이나 심리를 묘사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가요. 이와이 슈운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인물의 내면을 관객에게 전달해내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겠죠.
자, 이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여자를 묶던 남자는 더 세게 묶어 달라는 여자의 요구에 결국 지쳐 포기하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그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불행히도 이제 이들에겐 소통할 기회마저 사라진 것이죠. 조금 우울한 이 결말에서 그녀는 묻습니다.
‘우린 풀려있던걸까, 묶여있던 걸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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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선
모든 것들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물론 병조림이냐 통조림이냐에 따라 유효기간은 다르죠.
그 날 개봉해서 먹어야 상하지 않는 음식이 있고,
적어도 몇 년간은 안심해도 되는 음식이 있듯이요.
희망. 꿈. 사랑. 미래. 용기..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
당신에게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건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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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