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영화이야기

뽀삐 : 라면의 시너지 효과


글: 정영선
2002년 10월 11일

눈이 정말 펑펑 쏟아지던 날. 그 집 문을 연 건 행운이었습니다. 어떤 집이었냐구요? 상호만으로도 필이 딱 꽂히는 '라면 땡기는 날’이라는 집이었죠. 아트선재 앞에 위치한 이 집의 라면은 정말 ‘예술’입니다. 일단 기본기에 충실하기 때문에 변형된 어떤 종류의 라면도 맛있습니다. 해장라면은 콩나물을 넣어서 시원하고, 짬뽕라면은 각종 야채에 얼큰한 맛이 일품이구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은 미소라면인데, 담백하고 개운한 맛이 정말 끝내줍니다. 특히 이 집의 포인트는 뚝배기에서 나오는 국물맛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시죠? 라면의 생명은 국물인 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쫄깃한 면발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군침이 돕니다. 아, 먹고 싶어라.

그녀가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전 귀가 솔깃했습니다. “뭐? 그 라면이 그 라면이라구?” 아,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너무 바빠서, 혹은 너무 게을러서, 그 인기절정(?)의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이번엔 그녀가 <뽀삐>라는 영화를 제작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뽀삐? 제목부터 너무 상큼하고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게다가 애완견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라니. 이미 아는 선배로부터 그녀에 관한 평을 들은지라 기대감에 부풀었죠.

객석에 불이 꺼지고, 다시 불이 켜지고.

전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입니다. ‘살아있다’ ‘움직인다’ ‘ 깨어있다’ 라고 느끼게 되죠. 조금 엉성한 구석이 있어도, 조금 거친 맛이 있어도, 그 단점들을 대체할 매력들이 독립영화엔 무궁무진하게 숨어있거든요. 물론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습니다. ‘독립’이니 ‘단편’이니 하는 말을 면죄부처럼 사용하는 영화들이요. 마음 약한 관객들도 여기서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영화에 대한 객관적 비평의 강도는 줄어들고 대신 ‘뭐, 발목을 잡는 일이 한 두 가지 였겠어.’라고 슬쩍 넘어가게 되죠.

<뽀삐>는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영화입니다. 말이 잔치를 이루고 있지만 대개가 동어반복입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계속 흔들리고, 런닝타임이 슬슬 지겨워지죠. 물론 중간중간 재치있고, 예리한 통찰로 넘어갈 듯 말 듯한 설정도 있습니다만 (결국 못 넘어갑니다.) 그 모든 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습니다. 독립영화의 프리즘은 셀 수 없이 다양합니다. <호모 파베르>의 상상력이나 <샴, 하드로맨스>의 회화적 질감, 혹은 <명성, 그 6일의 기록>의 가슴 저릿함까지. 뽀삐가 아쉬운 건 그 프리즘 속에서 자기 색깔을 찾지 못했다는 거죠.

<담포포>에서 라면의 대가인 노인이 하는 말 중에 ‘라면이란 시너지가 일어나야 하는 음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도 라면을 먹기 전, 돼지고기 고명을 살짝 들어서 ‘빨리 뵙도록 하죠’ 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조리과정에서의 세심함과 그것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기막힌 맛을 표현한 거겠죠.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디지털 영화이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길 바란다면 무리일까요? 재료가 부족해서, 화력이 워낙 세질 않아서, 손님이 너무 빨리 재촉해서... 아, 그리고 보니 이유가 너무나도 많군요. 마음 약한 손님은 거절하기도 힘든 법. 이번 라면은 대충 허기만 때우고, 다음번 라면은 좀 더 맛있게 끓여달라고 부탁해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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