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영화이야기

히 러브스 미 : 과일주, 함부로 드시지 마세요


글: 정영선
2003년 02월 17일

갓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일입니다. 당시는 레몬주등의 과일주가 대학가를 평정하던 시절, 저 역시 그 물결에 동참하고 있었죠. 당시 ‘필름이 끊기는 경험’을 너무나도(!) 해보고 싶었던 저는 결국 제대로 과일주를 만든다는 술집에서 술꽤나 한다는 친구와 대작을 했습니다. 6시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야금야금 시간을 먹어치우고 있었고 왠만해선 끝이 날 것 같지 않았죠. 결국 10시 통금시간을 지키기 위해 9시경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의 모습이죠? ^^;)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습니다. 주위의 증언에 따르면 9시경 술집을 나선 저는 자정인 12시가 다 되어서야 가족의 품에 안겼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3시간 동안 어디갔었냐구요? 그건 저도 모르죠.^^

<히 러브스 미>는 정말 상큼발랄깜찍한 영화입니다. 일단 주인공 오드리 토투가 그렇고, 화면 가득 펼쳐지는 팬시적인 영상과 재치넘치는 소품들, 그리고 따뜻하고 기분좋은 배경들도 그렇습니다. 만발한 장미꽃 사이로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주인공 안젤리끄(오드리 토투)~! 이미 <아멜리에>에서 심상치 않은 사랑을 보여줬던 그녀가 선택한 새로운 상대는 바로 심장전문의 루이(사무엘 르 비앙)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유부남이죠. 하지만 안젤리끄는 두 사람의 사랑이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죠.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가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 안젤리끄의 시선과 루이의 시선으로 나뉩니다. 관객들은 안젤리끄의 말만 믿고 영화를 보다가, 루이의 이야기가 시작하면 그제서야 안젤리끄의 언변에 속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이야기는 판이하죠. 이렇게 같은 상황을 다르게 기억하거나 판단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좀 다른 예이긴 합니다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도 그렇고,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의 소설들도 그렇고, 우리가 경험하는 순간순간의 모든 것들이 그러니까요.

결국 안젤리끄의 사랑은 엉뚱한 집착임이 밝혀집니다. 혹시 드 클레랑보 신드롬 (de Clérambault's syndrome)을 아세요? 이 신드롬은 ‘가장 지속적인 사랑의 한 형태이며, 흔히 환자가 죽어야만 끝이 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연구 문헌을 인용하자면, 이 신드롬은 환자는 대개 여성이며, 대상은 흔히 사회적 신분이 높은 남성이죠. 환자는 대상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강렬한 망상적 신념을 지닙니다. 환자는 망상의 대상과 몇 번 스쳐지났거나, 전혀 접촉한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상이 기혼자라는 사실은 대부분 환자에게 전혀 상관이 없는 일로 간주됩니다. 대상이 확연히 보여주는 무관심이나 심지어 증오까지도 환자에게는 역설적으로 혹은 정반대로 자신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보이죠. 즉 어떤 경우에도 대상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확고부동한 겁니다. 그리고 이 확신으로부터 다양한 다른 확신이 파생됩니다. 대상이 자기 없이는 결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확신,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인정되고 있다는 확신등이 그것이죠.

하지만 사랑을 집착과 구분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의 병리적 체험은 정상적 사랑의 체험과 밀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겹쳐 있어서 우리의 가장 소중한 체험 가운데 하나인 사랑이 정신병리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고 했으니까요

<히 러브스 미>는 드 클레랑보 신드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집착’이라는 이 무거운 소재는 CF감독 출신의 젊은 감독 래티샤 콜롱바니와 기분좋은 배우 오드리 토투를 만난 덕분에 시종 경쾌하고 통통 튀는 분위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오드리 토투의 최근작 ‘좋은걸 어떡해 (Dieu est grand, je suis toute petite)’는 김빠진 맥주 같은 영화였죠. 내용이 중구난방이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없었으니까요. 게다기 그녀의 매력도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구요. 거기에 비한다면 <히 러브스 미>에서 그녀는 자신의 엽기적인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고 있습니다.

탱글탱글하고 새콤한 과일들로 절여진 과일주는 그저 달콤하기만 합니다. 처음엔 높은 도수의 알콜이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 않죠. 하지만 홀짝홀짝 마시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취하게 됩니다. 그리곤 서너시간쯤 내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조차 까맣게 잊게 되는 거죠. <히 러브스 미>의 사랑도 마찬가집니다. 달콤한 그 맛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린 이런 지독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내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지금의 내 판단이 맞는지조차 까맣게 잊어 버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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